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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수련회 발표문

영부, 精山 2006. 10. 30. 10:01

  아래의 글은 지난 10월 수련회에서 제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물론 육성으로 하는 강좌의 내용과는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 궤도에서 이탈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영혼 힐링은 지성이나 이성적으로 진화가 함께 되어야 하기 떄문에 이런 강좌도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수련회에 참가하고 싶어도 여러가지 사정으로 불참하신 분들을 위하여 공개하도록 하겠으니 많은 지도편달과 성원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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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삶을 위하여 

 

1. 행복한 삶이란?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 불행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진정 행복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행복의 개념부터 설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에 따라 불행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할 수도 있고,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불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해서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며, 다리 밑의 거지라고 해서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사과에 대한 묘사를 한다고 하여도 직접 먹어보는 것만큼 명료한 것은 없는 것처럼, 행복에 대한 것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샘플을 제시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몇 사람의 경우나, 국한 된 지역 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통틀어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아마 제일 먼저 예수나 부처를 삶의 전형(典型)으로 연상할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당연히 그들의 삶을 살피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다. 아마 그러기 때문에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어지는 것이리라. 그들의 삶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간의 영혼을 밝히는 일’이었다. 물론 불교에서는 영혼이라는 표현 대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한 것처럼 ‘마음’을 내세웠지만, 그 의미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2. 행복의 정의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 돈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예수나 부처의 삶은 더 없이 초라하게 보일 것이며, 고고한 명예를 기준으로 삼는 선비에게는 수억대의 뇌물은 쓰레기만도 못할 것이다.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나 부처, 선비의 삶을 행복의 전형이라고 할 것이며, 물질적인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무슨 소리야? 예수나 부처도 굶어 봐.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라고 할 것이다. 오늘과 같은 극단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배고픈 소크라테스 보다 살진 돼지를 더 행복한 삶의 전형으로 삼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청빈(淸貧)을 선비의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정신과 물질, 영과 육, 음과 양이 한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행복을 가리키는 행(幸)이라는 글자를 보면 그 의미가 선명해지는데 一과 立과 十이 합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즉 위로는 一태극이 있고, 밑으로는 十무극을 서로 합쳐서 세워 놓은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一은 시종, 상하, 전후, 좌우 등이 있는 유형의 형상을 가리키고, 十(0)은 아무런 틀이 없는 무형의 정신을 가리킨다. 따라서 幸은 유형과 무형, 물질과 정신이 하나로 조화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나 부처의 삶이 행복의 전형이라고 하는 까닭은 영과 육, 정신과 육신의 양면을 동시에 온전하게 조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나 부처는 정신적인 면이나 영혼에 관한 것만 지닌 것으로 착각한다. 예수나 부처는 누구보다 풍요로운 물질을 만들고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다만 그런 것을 위하거나, 축적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물질이나 정신이나 어느 한 곳으로 몰리면 흐름과 조화가 깨지게 되고, 그것은 결국 모든 사람의 불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리사욕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만인과 더불어 잘 살기 위한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으며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행복은 조화와 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천지의 조화와 균형, 음양의 조화와 균형, 일월의 조화와 균형, 영과 육의 조화와 균형, 심신(心身)의 조화와 균형 등이 바로 그것이다.  

 

 

3. 행복한 삶을 위하여 

 

그렇다면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답은 명료하다. 조화와 균형을 이룬 삶을 사는 것이다. 인체에서 그것을 찾는다면 영혼과 육신의 조화와 균형이다. 사회적으로 본다면 직장과 개인, 사회와 개인, 국가와 개인의 조화와 균형이다. 더 넓게 본다면 세계와 국가, 우주와 인간,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균형까지 이루어져야 비로소 온전히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가리켜 옛 어른들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수신(修身)이다. 수신은 개인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제가와 치국, 평천하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에선 수신에 관한 것만 언급하기로 한다. 수신이란 용어는 본래 유교에서 파생했다. 그러기에 인의예지신과 같은 오상(五常)이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과 같은 7정을 다스리는 것을 기본적인 덕목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마치 호랑이를 실로 묶어서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을 그간의 체험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것은 인류가 만들어낸 정신적인 산물이요, 학문임에는 분명하지만 지금처럼 시대가 격변하고 혼돈 된 세상에서는 그것보다 더 강력하고 근원적인 처방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을 이루고 있는 것은 영혼과 육신이다. 영혼은 인간이 만들어낸 학문이나 언어, 문자 이전의 것이므로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혼과 육신의 정화에 대한 걸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 영혼과 육신 

 

1. 영혼의 정의 

 

영혼에 대한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 영혼靈魂 [명사] 1. 육체가 아니면서 육체에 깃들어 인간의 활동을 지배하며, 죽어서도 육체를 떠나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정신적 실체(實體). 영가(靈駕). 혼령(魂靈). ↔ 육체(肉體). 2. 가톨릭에서, 불사불멸의 신령한 정신을 이르는 말. 영신(靈神).> 

 

이글에서 말하는 영혼은 특정한 종교와는 무관한 것으로서 ‘영의 성질’이나 ‘영의 성품’을 줄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상대되는 표현은 육(肉)의 성질이나 육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도 자세하게 언급하자면 영(靈)과 혼(魂)으로 구분하여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육신에 상대적인 정신이나 마음 정도로 알아두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2. 영혼과 육신 

 

우주는 크게 무형과 유형으로 구분하는 것처럼 인체도 역시 무형과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무형적인 것을 가리켜 영혼이라 하고, 유형적인 것을 가리켜 육신이라고 한다. 하늘은 허공이지만 그 속에서 모든 생물의 씨앗이 땅으로 내려와 발아하는 것처럼, 영혼에 깃들였던 것들이 육신의 세포나 각 기관으로 흘러들어가 생명은 물론, 온갖 이성과 감성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허공이라는 하늘이 없다면 영혼도 없다고 할 수 있지만, 허공이 있다면 영혼도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허공은 무형이기에 소멸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영혼도 역시 소멸하는 존재가 아니다. 유형은 반드시 생멸이 있는 것처럼 육신도 역시 생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영혼으로 다시 회귀한다는 의미다.  

하늘은 비록 무형이지만 땅에 그 모습을 반사하는 것처럼, 영혼도 역시 무형이지만 육신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이 맑아야 하는 것처럼 영혼도 맑은 법이다. 땅은 탁한 것처럼 육신은 영혼에 비해 탁하게 마련이다. 하늘은 발산을 위주로 하는 것처럼, 영혼도 발산을 위주로 한다. 땅은 수렴을 위주로 하는 것처럼 육신도 수렴을 위주로 한다. 하늘이 무한한 것처럼, 영혼도 무한한 능력이 있다. 땅은 유한한 것처럼, 육신은 항상 유한하다. 하늘이 시공의 제약이 없는 것처럼, 영혼도 시공의 제한이 없다. 땅은 시공의 제약이 있는 것처럼, 육신도 시공의 제한을 받는다. 따라서 영혼은 영원한 것이며, 육신은 한시적인 것이다.  

 

 

3, 명암과 청탁 

 

하늘은 본래 어둠과 밝음이 없는 것처럼, 영혼도 역시 명암(明暗)이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주야도 있으며, 흐린 날과 맑은 날이 있다. 마찬가지로 본래 영혼은 청탁이나 명암이 없지만, 마음은 어두울 때가 있는 가하면, 밝을 때도 있다. 

하늘은 절대적인 무형인데 어떻게 해서 상대적인 명암이 있는 걸까? 그것은 하늘 자체가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땅에서 올라간 기가 청탁이 있기 때문이다. 땅은 본래 상대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육신도 역시 상대적인 것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영혼 자체는 본래 선악도 없고, 청탁도 없다. 그러나 육신은 청탁이 있으며, 고저, 장단, 명암이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 명암과 청탁이 있는 것은 땅을 기준으로 보는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명암은 불의 기운이나 양의 기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얼굴이 밝다’고 할 때에는 깨달음과 같은 지혜나, 환희나 희열 같은 감정이 솟아날 때를 가리킨다. 반대로 ‘얼굴이 어둡다’고 할 때에는 무지나 슬픔, 우울함 등의 감정이 나올 때다. 이처럼 명암은 인체에서 무형적인 지식이나 감정의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것을 가리켜 ‘신(神)의 속성’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 청탁은 유형적인 몸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얼굴이 맑다’고 할 때에는 몸을 이루고 있는 정기나 혈액이 맑은 상태를 가리킨다. 반대로 ‘얼굴이 탁하다’고 할 때에는 정기나 혈액이 탁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처럼 청탁은 인체에서 유형적인 정기나 혈액의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것을 가리켜 ‘정(精)의 속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몸이 맑고 어두운 것은 정(精)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요, 머리(지혜)가 밝고 어두운 것은 신(神)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정과 신을 합하여 정신(精神)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람의 명암과 청탁은 곧 정신과 기혈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4. 왜 육신이 필요한가? 

 

영혼은 하늘을 닮아서 아무런 선악이나 청탁이 없다. 이것은 하늘은 본래 무형이어서 아무런 먼지가 때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말과 같다. 하늘이 어둡거나 탁해지는 까닭은 땅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현상들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리대로 본다면 인생의 온갖 생노병사의 번민도 육신으로 인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법도 하다. - ‘하늘만 있으면 그만이지, 땅은 무엇 하려고 생겼을까?‘ ’영혼만 있으면 그만이지 육신은 왜 생긴 것일까?‘ - 어차피 한 번은 썩어서 없어질 육신이라면 차라리 아예 생기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을까?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농사를 예로 들어 보자. 쌀만 있으면 그만이지, 무엇하러 벼 잎이나 줄기, 뿌리가 있어야 하는가? 그런데 잎사귀나 줄기, 뿌리가 없이 어떻게 열매가 나올 수 있을까? 열매를 영혼이라고 한다면 줄기와 가지, 잎사귀, 꽃은 육신이다. 더 세밀하게 말한다면 뿌리는 조상이요, 싹은 태아요, 가지는 힘줄이며, 잎사귀는 허파요, 꽃은 전성기의 미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영혼을 위한 것이다.  

육신은 영혼을 열매 맺기 위한 밭이다. 밭이 왜 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아마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당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육신이 왜 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5. 밭과 육신 

 

밭은 육신이다. 밭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육신에도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둔다. 사람 속에 있는 밭을 가리켜 ‘마음 밭’이라고 한다. 육신의 씨앗은 자궁에 뿌리고 영혼의 씨앗은 마음 밭에 뿌린다. 밭을 가리키는 田자를 보면 口속에 十을 가둔 상태다. 十은 동서남북의 기운을 수렴하기도 하고, 분산하기도 한다. 田의 형상이 네 개의 작은 口로 이루어진 것을 보아도 이런 사정은 명백해진다. 10은 1 + 2 + 3 + 4인데, 네 개의 작은 口를 가리킨다. 따라서 十은 사방을 두루 포함한 허공이므로 하늘을 상징한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십을 가리켜 무극(無極)이라고 하였다.  

田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늘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이 밭이다. 하늘을 마음이요, 밭(땅)을 육신이라고 한다면, 육신은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해야 한다. 무형의 하늘은 밭을 통해서 그 형상을 드러내는 것처럼, 마음도 역시 육신을 통해서 드러난다. 田자에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밭의 의미를 마음에서 받치고 있는 것을 사(思 : 생각 사)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은 보이는 육신을 통해서 찾아야 한다. 하늘의 도를 찾고 싶으면 당연히 눈에 보이는 밭(땅)을 찾으라. 열매가 밭을 통하여 그 모습이 드러나고 익는 것처럼, 영혼도 육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고, 온전해 질 수도 없다.  

미련한 사람은 하늘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찾으려고 한다. 보이는 것도 모르면서 안 보이는 것을 알려고 한다는 것은 마치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려는 것과 같다. 이런 속담을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한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주위에는 연목구어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밭에서 열매를 구하려고 해야 하건만, 하늘이나 허공에서 구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6. 천지가 하는 일 

 

마음은 본래 허공과 같다. 허공은 아무런 걸림이 없다. 누가 허공에 돌을 매달아 달 수 있으며,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허공이나 하늘은 ‘영원한 대자유’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하늘을 가리켜 원방각 중에서 원(圓)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둥근 원은 자유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에 갑갑할 때에는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이라는 용어도 ‘한 얼’과 상통한다. 얼은 무형의 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정신은 항상 자유를 갈구한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하늘도 밭이 아니면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만약 하늘이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해결 할 수 있다면 굳이 땅을 만들 필요도 없으리라. 하늘이 하는 일이 따로 있고, 땅이 하는 일이 따로 있으며, 인간이 하는 일이 따로 있기에 천지인 3계가 벌어진 것이 아닌가?  

마음도 역시 스스로 모든 걸 다 해결하는 건 아니다. 마음은 반드시 육신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며,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하늘과 밭(땅)이 합하여 온전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인체도 역시 마음과 육신이 합하여 온전한 영혼이라는 열매를 만들어낸다. 마음이나 육신은 열매가 아니다. 영혼이 열매다. 영혼을 힐링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바로 이런 데에 있다.  

하늘과 땅의 열매는 인간이다. 마음이 하늘이요, 육신은 땅이라면 영혼은 인간에 해당한다. 마음은 하늘에 속한 것이기에 하늘이 알아서 할 것이고, 육신은 땅에 속한 것이기에 땅이 알아서 할 일이다. 과거의 천존시대와 지존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지금은 인존시대에 살고 있다. 인존시대는 당연히 마음이나 육신이 아닌 영혼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따라서 지금은 마음수련이나 몸 수련보다 영혼의 힐링을 해야 한다.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라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합하여 해 놓는 일은 훌륭한 자녀를 만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이 합하여 해 놓는 일은 만물이 알찬 열매를 맺어 풍요로운 수확을 하게 하는 것이다. 훌륭한 자녀는 온전한 영혼, 정화된 영혼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다. 하늘이 하는 일은 가정에서 아버지가 하는 일과 같다. 아버지는 가정의 기강을 세우고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하며 외부로부터 가정을 보호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은 자연과 만물의 기강을 세우며, 비와 구름, 바람 등을 통하여 대기가 안정적으로 흐르도록 한다. 하늘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씨와 연관되는데, 날씨를 사람에게서 찾는다면 맘씨라고 할 수 있다. 가족들의 맘씨를 좋게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아버지의 몫이다. 날씨에 따라 만물의 생존환경이 영향을 받는 것처럼 가정에서도 아버지의 맘씨에 따라 근간이 형성된다. 하늘이 텅 빈 것처럼 아버지의 마음도 어느 한 곳으로 쏠리지 않아야 하는데 이를 가리켜 ‘사심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는 땅의 역할을 본 받는데, 땅은 모든 생물을 다 품어준다. 선악과 청탁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생명을 품어주므로 한없는 덕을 드러낸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정기를 한 곳에 모아 생명체라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것을 가리켜 ‘살림’이라고 한다. 하늘의 생명은 본래 형상이 없지만, 땅은 그것을 고이 품어서 형상을 지닌 생명체로 살려내는 것이므로 살림이라고 한다. 남편으로부터 정자를 받아 자녀를 생산하는가 하면, 남편이 벌어다 준 돈을 알뜰하게 간직하여 식비, 교육비, 의료비, 의상비 등,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살림을 하는 것이 아내요 어머니다.  

아버지는 하늘이요, 마음이며, 어머니는 땅이요, 육신이다. 인간의 기강을 세우는 것은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하늘이 날씨로써 만물의 기강을 세우는 것처럼, 인간도 맘씨가 바로 잡혀야 기강도 바로 잡힌다. 하늘이 텅 빈 것처럼 인간도 마음을 비워야 하는데, 이는 곧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아버지가 외부로부터 가정을 보호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이 강건해야 삿된 망상(妄想)에서 자신을 보전할 수 있다. 하늘이 고루 대기를 안정되게 하는 것처럼, 사람도 마음이 안정되어야 기운이 조화롭게 흐른다. 땅과 어머니가 생명체가 형체를 가지게 하는 것처럼, 육신도 마음의 기를 받아 형상으로 드러나게 한다. 하늘이 땅을 통하여 그 모습과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처럼, 마음은 반드시 육신을 통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에게는 무형의 지식이나 감정이 있는데 이는 하늘과 마음의 모습이다. 이런 지식과 감정을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땅에 해당하는 육신이다. 이목구비와 몸을 통하여 음성이나 눈짓, 손 발짓으로 표현을 하는데, 이는 모두 육신에 속한 것이다. 땅이 채소를 내고, 동물을 내는 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씨앗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표정이나 언행 등이 선악으로 갈리는 것은 맘씨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열매가 맺히기 까지는 변화무쌍한 날씨의 변덕과, 지기(地氣)의 변동을 이겨내야 하는 것처럼, 영혼의 열매도 마음과 몸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날씨를 가리켜 천기(天氣)라 한다. 천기와 지기를 이겨야 온전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영혼도 천기와 지기에 능히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7. 생명의 전개 과정 

 

물에 속한 정(精)과 불에 속한 신(神)을 합하여 정신이라고 한다. 정신은 기(氣)를 매개체로 하여 연결된다. 그러기에 정기신(精氣神)을 삼보(三寶)라고 고서에는 기록을 했다. 영과 혼도 역시 기를 매개체로 하여 연결되는 건 같다. 그렇다면 정신과 영혼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또한 마음과 정신, 영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런 것들은 모두 무형이라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몸은 유형이기에 또렷하게 구별할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은 무형이기에 좀처럼 구별하기가 애매하다. 그러나 굳이 다른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무언가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우주는 천지라는 큰 틀이 있다. 인체도 역시 마음과 몸이라는 틀로 나누어진다. 하늘은 차가운 수증기가 많이 있고, 땅 속에는 따스한 온기(溫氣)가 있다. 하늘은 본래 양기가 충만한 곳이기에 음기를 끌어들여야 하므로 수증기가 많이 있는 법이요, 땅은 본래 음기가 충만한 곳이기에 양기를 끌어드려야 하므로 따스한 온기가 있게 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은 하늘의 속성을 닮아 양이 많아 밝기 때문에 음기에 속하는 물의 냉기를 요구한다. 이런 이치에 의해 마음은 밝음과 맑음을 동시에 지닌다. 그것은 배도 마찬가지여서 맑음과 따스함을 동시에 지닌다. 인체를 구조학적인 면에서 볼 적에도 하늘에 속하는 뇌는 차가우면서 맑아야 하고, 반대로 배는 따스해야 한다. 머리는 밝은 신이 있는 곳이므로 맑은 음기를 필요로 하고, 배는 어두운 음식물을 분해, 소화하는 곳이므로 따스한 온기가 필요하다.  

하늘에서 땅으로 생명의 인자(因子)가 심겨지는데, 생명의 인자를 다른 말로 한다면 하늘의 정기와 신기, 즉 정신이다. 생명은 본래 눈에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해서 씨앗(정자, 난자)이라는 형상으로 나타나게 될까? 생명에는 신기와 정기가 있는데, 신기는 양기가 많기 때문에 하늘로 발산하는 경향이 강하고, 정기는 음기가 많기 때문에 밑(땅)으로 고이는 경향이 강하다. 정기는 발산하려는 신기를 안으로 감싸 안아서 적당한 형상을 만든다. 따라서 겉으로는 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강력한 불기운이 있는데, 정액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처럼 정자를 담고 있는 정액은 정기와 신기, 즉 정신의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난자도 마찬가지다.  

부모로부터 생명을 물려받는 것은 정신을 물려받는 것이다. 형상은 어쩔 수 없이 땅이 품어야 하는 법이므로 형상화 한 씨앗은 밭에 심겨진다. 씨앗은 싹이 나고 뿌리가 뻗으며, 줄기와 가지가 뻗고, 꽃이 피어 형상의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형상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처럼 꽃은 떨어지고, 마침내 고대하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다. 이것이 식물로 본 생명의 전개과정인데,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늘(마음)의 기운인 씨앗(정신)이 땅(육신)에 심겨져 열매(영혼)를 맺는 것이 생명의 전개과정이다.』 

 

 

 

8. 영혼과 정신 

 

이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살필 것 같으면, 

『하늘 = 마음 

땅  = 육신 

기운 = 씨앗 

씨앗 = 정신 

뿌리 = 양기의 발현(發顯) 

싹  = 음기의 발현(發顯) 

줄기 = 몸통 

가지 = 사지의 수족  

꽃  = 정신의 최대발산  

열매 = 영혼』 

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밭에 심는 씨앗을 정신이라고 하며, 마지막 열매를 가리켜 영혼이라고 한다. 씨앗은 땅 속에 묻히는 순간 눈으로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정신도 역시 수정란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수정란은 하늘의 양기와 땅의 음기가 합한 것인데, 하늘의 양기는 땅을 찾는 속성에 따라 땅속을 파고들어 물을 찾는데 그것이 바로 뿌리다. 반대로 땅의 음기는 하늘의 양기를 찾는 속성에 따라 위로 올라가 태양 볕을 찾는데 그것이 바로 싹이다. 떡잎은 두 개로 나뉘는데 그것은 본래 천지가 음양의 두 기운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씨앗이 발아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뿌리가 나오고 다음에 떡잎이 나오는데, 하늘의 양기가 먼저 드러나고 땅의 음기가 나중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은 음양이 함께 움직이지만, 양의 성질이 약동적이기 때문에 먼저 뿌리가 생기는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사람은 천지의 합작품이다. 천지는 정신으로 만물을 낳고, 만물의 영장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천지의 정신이 가장 이상적으로 드러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우리말에 ‘정신 차리라’는 것이 있다. 차린다는 말은 ‘상을 차리다’, ‘의관을 차리다’고 할 때에 쓰이는 것처럼, 무언가 격식을 갖출 때에 사용한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정신에 맞는 격식을 갖춘다는 의미다.  

이에 비해서 영혼은 ‘차리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다. 차리는 것은 준비된 것을 질서정연하게 갖추는 것을 가리키고, 진화하는 것은 자라는 것을 가리킨다. 만물이 태어나는 것은 천지의 정신이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천지의 정신은 항상 자연 속에 있는 것이다. 준비된 제물을 상에 차리는 것처럼, 항상 준비된 천지의 정신을 물질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생명의 탄생이다. 이런 이치에 의해 앞에서 씨앗을 가리켜 천지의 정신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무형의 정신이 유형의 형상으로 드러날 때에는 항상 물을 통하게 되어 있다. 형상은 무형으로 있던 기운이 하나로 응집한 결과다. 기운이 흩어지면 무형으로 화하고, 무형의 기운이 하나로 응축되면 유형으로 변한다. 물은 모이는 것이며, 불은 흩어지는 것이다. 물은 천지의 정신이 하나로 모인 상징이다. 그러기에 예부터 천지신명께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전통으로 남아 있다. 정신을 차린다는 말은 곧 정신을 한 곳으로 모은다는 의미다. 이처럼 정신은 물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영혼은 밝은 것이다. 밝다는 것은 곧 불의 속성을 의미한다. 천지의 기운은 한 곳으로 모일 때가 있으면 반드시 흩어질 때도 있다. 안으로 모이는 것은 밖으로 강하게 발산하기 위한 작용이며, 밖으로 발산하는 것은 다시 새로운 모임을 형성하기 위한 작용이다. 씨앗이 만일 처음에 있던 한 알갱이로만 있다면 어찌 수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씨앗은 땅 속에 묻히게 되므로 누구도 그 형상을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천지의 기운의 집합체인 정신도 그 형상을 볼 수 없다. ‘정신을 보았다’는 말이 없는 건 이와 같은 이치에 의해서다. 그러나 열매는 밖으로 열리는 법이므로 누구나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영혼을 본다’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정신은 천지의 정기와 신기로 있다가 생명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기 때문에 ‘정신 나간 놈’도 있고, ‘정신 차린 놈’도 있다. 영혼도 역시 사람에게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는데 ‘영혼 차린 놈, 영혼 나간 놈’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떠나다’고 하는가 하면, ‘영혼이 돌아오다’고 한다.  

이처럼 정신이나 영혼이 출입 하는 것은 같은데, 그 표현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정신이 출입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는 외출과 같다. 볼 일이 있어서 먼 곳이건, 가까운 곳이건, 나갔다가 들어오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에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 가끔 예외는 있긴 하지만, 영혼은 한 번 떠나면 다시 육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만, 일단 열매가 한 번 떨어지면 영영 나무와 이별하는 이치와 같다. 이것을 보아도 정신과 영혼은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수련회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