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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그 후 세계

영부, 精山 2006. 12. 4. 10:04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심심치 않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

오늘 새벽 심향아님의 부친께서 작고하셨다는 부음을 받고 보니 문득 그런 물음이 떠오른다.

인생이란 게 본래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라지만, 역시 죽음 앞에서는 숙연해진다.

부처님께 어떤 사람이 죽은 아들에 대한 감정으로 오열을 하면서 다시 살릴 수 없느냐고 물었다.

부처님은 '어느 집이던지 초상을 당해 보지 않은 집이 없다면 그게 가능할 것'이라는 답을 하셨다.

그 사람이 온 동네를 다녀보았지만 그런 집은 없었다.

 

공자님에게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질문을 어느 제자가 하였다.

'살아 있는 것도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을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 공자님의 대답이었다.

 

내 경험에는 죽음이란 것은 없다고 본다.

있다면 '변화'만이 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내가 죽어도 내 몸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형체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주는 본래 질량이 변하지 않는다.

바닷물이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항상 그 모습, 그 분량을 유지하는 것처럼 우주도 그렇다.

지금의 바위가 어느 세월이 되면 닳아 없어져 다른 물질로 변하고, 그것은 다시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일 뿐, 결코 그것이 다른 곳으로 사라지거나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형체를 이루고 있던 여러가지 요소들도 그 주인인 영혼이 떠나면 각기 제 갈길로 뿔뿔이 흩어진다.

 

기독교의 창조론을 보면 인류의 탄생이 6,000년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서양의 근시안적인 물본주의에서 나온 유치한 견해다.

인간의 탄생은 신의 탄생 그 자체다.

그것은 그 누구도 밝힐 수 없다.

아니 밝히려고 하는 자체가 어리석다.

 

지금 있던 것은 과거에도 있었다.

인간은 어느 누가 만들어서 생긴 것도 아니며, 어느 누가 걷어가서 목숨을 잃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반복할 따름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인연이라고 하며, 자연에서는 생성, 순환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철저하게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기에 인간의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돌고 도는 것!

지금 비록 심항아님의 부친께서 몸을 벗으셨지만,

그것은 다시 새로운 삶을 잉태하는 의식일 뿐, 결코 그 생이 끝난 건 아니다.

 

어느 누가 말하는 것처럼,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인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하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건 절대 명제다.

하지만 육신의 목숨만이 생명일까?

육신은 물질이요, 물질은 항상 변하는 게 철칙이라면 인생은 너무 무미건조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이나, 수운선생의 죽음이나, 이차돈의 죽음이 감동적인 것은 그들은 육신의 목숨을 초월한 진정한 생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죽는다.

그리고 아침이면 어김없이 새로운 생을 맞이한다.

 

잘 죽는 자만이 영원한 생을 누린다.

 

잘 죽자!

잘 살자!

 

고인이시여!

그래도 심향아님과 같은 아름다운 분을 세상에 남기셨으니 편히 눈을 감으셔도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