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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계시?

영부, 精山 2006. 12. 9. 10:28
그저께 나는 지하철 7호선 신풍역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7, 8년 전인가? 그는 현무경에 대하여 몇 번인가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후론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신풍역 6번출구에서 만나자고 하는 전화가 왔다.

40대 초반 정도로 기억하던 그는 생각보다 많이 늙어 있었다. 노란끼가 다분한 그의 얼굴은 소화기가 안 좋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말 소리에도 기운이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앞장서서 걸었다. 나도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고 그냥 따라갔다.

지하철에서 1분 정도 걸었을까? 그는 어느 지하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거기에는 부부인 듯한 남녀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남자는 스님처럼 머리를 짧게 깎고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부인도 역시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낯이 매우 익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무언가 도를 추구하고자 여러 사람들과 교류한 적이 있었는데, 나와는 말을 나눈 적은 없었지만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에 혀에 이상이 있는지, 발음이 어눌하였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금방 눈에 띄었다.

청국장으로 식사를 한 후, 나는 도대체 왜 나를 그곳으로 불렀는지 궁금하다고 하였다. J라는 집주인은
"우리나라가 매우 어지럽습니다. 정치, 종교, 경제, 환경, 교육 등 어느 분야를 둘러보아도 혼돈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나는 하늘이 계시하는 대로 이 나라를 이끌 15인을 만나기 위해 지금 여러분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정도령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이런 뜻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취지문 같은 것이 있나요?"

"없습니다. 일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기 때문에 안 만들었습니다"

"물론 일은 말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딴 소리를 할 수도 있지요. 지금 세상은 기록으로 남기고 도장을 찍어도 못 믿는 세상입니다. 행동이란 것은 자신의 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다 글이나 말로 남기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런 일을 할 계획이나 진행 정도는 어떤가요?"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때 그때 의논을 정하고 그대로 실행하면 됩니다."

"그것도 한 방편은 될 수 있겠군요. 그러나 아무리 형식이 필요 없다고 해도 그런 일을 주도하는 사람의 생각은 알아야 합니다. 생각이 좋으면 좋게 될 것이요, 생각이 나쁘면 나쁘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모임을 주도하시는 분의 생각, 즉 깨달음 같은 것을 먼저 알고 싶군요."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하늘이 계시하는 대로 지금은 뜻 있는 분들이 합해야 할 때라고 하니까 15인이 먼저 모이자고 하는 겁니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글과 책, 기록들이 있어서 탈입니다. 그런 게 없어서 일이 안 되는 게 아니라, 행동이 없어서 안 되는 겁니다."

"그럴까요? 행동이 없어서 그럴까요? 내가 보기에는 책이나 글, 말도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행동도 너무 많더군요. 행위가 없이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지요. 정치가, 사업가, 예술가 등, 다방면에 걸쳐서 수많은 행위가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게 아닐까요? 행위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생각, 어딴 깨달음에서 나오는 행위인가 하는 것이 더 중대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내가 묻는 것은 그런 모임을 주도하는 분의 생각입니다.

그는 답이 없이 그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다들 그렇게 얘기하더군요. 예컨대 박회장님도 처음에는 그렇게 말씀을 하시다가 지금은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셨습니다. 서울시의원을 하시는 홍 **이란 분도 적극적으로 도와 주시려고 합니다. 아침에 제가 계시를 받았는데, 오늘 오시는 분한테 많이 배워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제가 어르신한테 배우고 있군요."

시간은 어느 덧 밤 9시가 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지금 세상에 그런 일을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심보다는 공심을 가졌다는 얘기이니 서로 모자라는 부분을 도와주면서 나아가자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나를 그곳으로 안내 한 ㅎ에게

"한 20분 간만 기도를 하면 좋은 계시가 내려올 겁니다."
고 하였다. 옆에서 부인이 거들기를

"ㅎ씨는 아직 온전하게 그런 몸으로 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계시를 받을 겁니다"
고 하였다.

돌아오는 내 발길은 매우 씁쓸했다. 그렇구나! 저 사람도 역시 기도를 하고, 하늘로부터 무언가 계시를 받아서 움직였구나! 그런 계시를 내리는 존재를 그들은 거의 옳은 신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옳건, 그르건 분명한 것은 그것은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은 특정인에게만 계시를 내려주는 옹색한 일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건 누구나 다 수긍할 수밖에 없는 객관성과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진리의 시제(時制)는 항상 '현재형'이다. 동서그금을 막론하고 항상 보고, 들을 수 있으며, 맛을 보기도 하며,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태양이 동에서 뜨고 서로 지는 현상은 특정인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다 누리는 객관성과 보편성이 있기에 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목구비로 느끼는 모든 것처럼 큰 소리로, 명료하게 하늘과 땅의 계시를 전해주는 것이 어디에 또 있을까? 예수는 지금도 이렇게 외친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렇다. 만물은 귀 있는 자에게 들리는 말을 하고 있으며, 눈 있는 자가 볼 수 있도록 빛을 내고 있으며, 코 있는 자가 맡을 수 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으며, 입 있는 자가 먹고 말을 할 수 있도록 생물을 내어 놓는다. 이처럼 확실한 계시가 어디 있을까? 내가 하느님이라면 굳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보이고 들리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은 그저 말 없는 가운데 말을 하고, 눈 없는 가운데 보이게 한다. 우리가 느끼는 그 모든 것이 이미 온전한 계시요, 하늘의 숨결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