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개벽과 창조의 차이
개벽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 개념을 명백히 할수록 좋다. 개벽을 더욱 상세하게 이해하는 방편으로 창조론과 비교를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1. 개벽은 무시무종이나 창조는 유시유종이다.
개벽은 시공을 초월한 것이지만, 기독교의 창조는 시공의 제한을 받는다. 그러기 때문에 창조론에서는 인간의 출현을 6,000년 전으로 제한하지만, 개벽론에서는 그런 말을 할 이유나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만물과 인간의 탄생은 본래 시공의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육신만을 자신이요, 인생인 것처럼 믿기 때문인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 한 순간도 우주에서 사라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리.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전도서 1장 1절 - 11절)’고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개벽은 천지인 3계가 동시에 함께 있지만, 창조론은 천지를 먼저 만들고 마지막 6일 째에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개벽론에서는 물질과 정신은 본래 같은 것으로 보고 있지만, 창조론은 육신을 만들고 생기를 불어 넣으니까 생령이 되었다고 한다. 보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현무경의 심령신대를 언급할 적에 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지만, 인간은 3계의 집이 한데 어울려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심(心), 영(靈), 신(神)이라고 하였다. 기독교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영, 혼, 몸이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신이 사는 집은 다른 데에 있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진정으로 바른 의식과, 고양(高揚)된 영혼을 바란다면 천지인 3계를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 성불(成佛)이나 득도(得道)에 도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이처럼 3계를 하나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2. 개벽은 도수가 있지만, 창조는 도수가 없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선천의 모든 종교에는 도수라는 개념이 없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을 지었다’고 하였으며 ‘성령의 권능’이나 ‘하나님의 입의 기운’ 등으로 우주만물을 지었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첫날에 ‘빛이 있으라!’고 한 대로 빛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보다는 불교의 인연설이 훨씬 더 합리적이며 과학적이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개벽에 사용한 도수에 비한다면 너무 추상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무경과 용담도를 보면 볼수록 체계적이고, 이치적이라는 느낌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개벽주가 아니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현무경을 보면 개벽주가 어떻게 천지개벽을 하고 후천 5만년의 틀을 짜 놓았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으니 이런 공부를 안하고 무슨 공부를 한단 말인가?
3. 개벽은 정신과 물질을 동시에 변화시킨다.
기독교의 창조론에서 사물의 변화를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었다고 하는 식인데, 거기에서 무슨 사물의 변화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기껏 한다는 말이 성령의 감동이나 은혜를 입어서 영통하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도 있는 것처럼,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진리의 영은 곧 사물의 도수를 알아야 가능한 법인데, 아예 그런 것이 없으니 그저 정성과 믿음을 강조하는 신앙심에 의존한다.
하지만 현무경이나 용담도에서는 북극의 자(子)로 사(巳)가 들어가 빙하가 녹아내릴 것을 또렷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것이 물질과 인간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도 자세하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곧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이치와 경우에 맞으면 큰 것이건, 작은 것이건 합당하게 일이 이루어진다는 철칙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개벽은 특정한 인물을 믿거나 숭배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연의 이치대로 살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