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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경은 언제 작성했나?

영부, 精山 2007. 1. 11. 06:57

7. 현무경은 언제 작성했나? 

 

현무경은 증산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현무경과 연관된 기록은 별로 없는 편인데, 대순전경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기유년 설날 경석(京石)의 집에서 현무경을 쓰시어 흰 병에 물을 담은 뒤에 양지(洋紙)에 글을 써서 권축(卷軸 : 둘둘 말아 놓음)을 지어 병(甁) 입을 막아 놓고 그 앞에 백지를 깔고, 백지 위에 현무경을 놓아 두시니라 (대순전경 4장 129절) 

 

 

증산은 서기 1871 신미년 9월에 정읍(井邑) 시루봉(甑山)에서 탄생하여, 1909 기유년 6월에 화천(化天)하셨으니, 마지막 화천 하시던 해에 현무경을 성편한 것으로 보인다. 증산의 甑은 ‘시루 증’자이니 증산은 ‘시루산’이다. 시루산이나 시루봉은 떡시루를 가리킨다. 떡시루는 다양한 곡식의 열매를 한데 빚어 넣어 한 개의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이는 곧 개벽주는 선천의 모든 학문과 사상, 문화의 정수와 진액을 한군데로 모아서 빚어낸다는 상징을 나타낸다. 정읍이란 지명도 ‘생명수’가 넘치는 세계의 우물이라는 의미다. 객망리(客望里 : 손바래기)라는 지명은 인류가 고대하던 귀한 손님, 즉 개벽주를 기다리던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개벽주의 탄생에 얽힌 해석만 제대로 하려고 하여도 적지 않은 분량이 필요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현무경의 성편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하는 선에서 그치기로 하겠다.  

현무경 서종과에도 기록하기를 ‘己酉正月一日巳時’라고 하였으니 서기 1909년 설날에 현무경이 성편된 것은 틀림없는 모양이다. 기유년 설날이라면 병인(丙寅)월 임오(壬午)일이다. 하필이면 왜 이날 현무경을 성편하였을까? 설날 선물로 그랬을까? 천지공사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이루어지는 법이거늘, 왜 차경석의 집에서, 흰 병에 물을 담고, 백지 위에 현무경을 놓았을까? 나중에 법궤(法櫃, 혹은 遁櫃라고도 함. 성경에는 모세의 십계명을 기록한 언약궤가 있다)를 만들어 그 속에 현무경을 집어넣고, 자물쇠를 잠근 후에 고수부에게 열쇠를 주면서 ‘이후에 주인이 아닌 자가 궤를 열려고 하면 벼락 맞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벼락도수’라고 말하기도 한다.  

앞에서 개벽주는 철저하게 ‘도수’를 활용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기유정월일일사시’도 도수에 맞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먼저 왜 기유년에 현무경을 성편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선후천의 개벽은 천간으로는 중앙의 무기(戊己)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중앙에서부터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물론 북방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남방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도 있는 등,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태초의 천지는 특정한 방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부터 사방, 팔방으로 한꺼번에 동시에 이루어졌다. 천지의 방위를 가리키는 부호는 천간이다. 그중에서도 중앙을 가리키는 것은 무와 기다. 1갑, 2을, 3병, 4정, 5무, 6기, 7경, 8신, 9임, 10계라고 할 수 있는데, 중앙은 5무, 6기다. 시간은 변화의 흐름이기 때문에 방위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냥, 자시, 축시, 인시 … 하는 식으로 표현을 하지만, 공간은 4방과 중앙의 구분이 있게 마련이다. 동방은 갑을, 남방은 병정, 서방은 경신, 북방은 임계라고 하며, 중앙은 무기라고 한다. 무기를 각기 오행으로 양토(陽土), 음토(陰土)라고 한 것도 토가 모든 것의 근본 바탕이요 중앙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