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는 속으로 다시 한 번 놀랐다.
의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요한복음의 구절을 그대로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현무경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서는 성경이나, 불경 등 기존의 경전들을 훤하게 꿰고 있었다니!
"그래서 아들인 예수보다 아버지인 여호와를 믿어야 한다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단체가 생긴 게 아닌가요?“
“하하하. 그거야말로 문자에 빠진 사람들의 근시안이죠. 아버지나 아들이라고 하니까 무슨 인간들처럼 하늘에도 가족제도가 있는 줄로 알고 있군요. 예수가 말하기를 부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건 곧 세상의 가족 개념이 부활의 자녀들에게는 없다는 말이지요. 예수는 아들의 이름으로 왔기에 그날과 그때를 모르게 마련입니다. 만약 누군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온다면 모든 걸 다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라?”
정도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들의 이름은 당연히 예수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여호와가 아니던가?
여호와의 이름이라면 이미 구약에 7천 번이나 넘게 나오지 않았나?
“이름이라는 건 상징입니다. 아들의 이름이라고 하면 아들의 자격을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고유명사를 일컫는 건 아닙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지요. 본래 여호와라는 이름은 성경의 원문에는 없는 이름입니다. 모세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 전에는 하나님은 그저 ‘전지전능한 존재’가 이름의 전부였지요. 그건 출애굽기 6장 3절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씨족 사이에서 만들어진 신의 이름이었죠. 그러나 하나님이 어찌 한 부족이나 씨족의 하나님에 국한 되나요? 그 경계를 터버리고 이스라엘 씨족에서 온 인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도하신 분이 예수였죠. 아들이 자라면 당연히 아버지가 되는 것처럼, 예수로 상징되는 아들의 영은 모든 인류를 하나로 일관하는 아버지의 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侍天主입니다.”
“시천주라면? 동학의 수운선생께서 말씀하신 그 시천주인가요?”
“그렇습니다. 시천주를 풀이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라는 말이지요. 그걸 숫자로 말한 것이 바로 十一歸體라고 합니다.”
“물론 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에는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내 안에 함께 한다’는 말이 나오고, 그것이 모든 인류의 염원이라는 건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걸 동학과 연결시킨다는 건 아무래도 너무 비약적인 게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그만큼 우리는 너무 동학에 대해서 무지한 게 사실이거든요. 동학은 하느님이 친히 수운선생의 손을 통해서 후천의 동세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탄생시킨 개벽의 나팔소리였습니다. 즉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느님이 이 땅에 오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후일 정도는 동학과 현무경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동학의 참 된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된다.
“예수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의미를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요? 예수가 가는 곳이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요? 그걸 지금 기독교인들처럼 막연하게 하늘 어딘 가에 있는 천국 정도로 알고 있다면 그야말로 유치원 수준이죠. 천국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예수는 어느 특정인을 가리킨 게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가리킨 겁니다. 길과 진리, 생명을 따라가기만 하면 누구든지 어린애 같은 아들의 신분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신분으로 자리매김을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기까지 복종한 댓가로 주어진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첫 사람은 ‘산영‘이었으나, 둘째 사람은 ’살려주는 영‘이었고, 마지막 사람은 ’하나 된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첫 사람은 아담과 같은 흙에 속한 인간의 유형이요, 둘째 사람은 하늘에 속한 예수와 같은 유형인 구세주이며, 셋째 사람은 한 영이 된 아버지 즉, 시천주를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면 그 누구도 보혜사를 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가 된다는 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