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교설
근본교설은 붓다가 직접 가르친 것으로, 또한 붓다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한 것이다.
아직 교단이 분열되기 전이었으므로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주장없이 그대로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근본교설에서는 형이상학설을 배제하고 세계와 인생의 현상적 존재에 대해서만 매우 합리적인 고찰을 하였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여러 교리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연기설(緣起說)이며, 연기설의 응용 내지 실천 이론들인 12연기,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윤회와 업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설(緣起說)
석존의 깨달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결국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의 자각'이 그 중심이다.
연기는 흔히 하는 '인연설(因緣說)' 을 가리킨다.
인연설은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말이다.
우리 속담으로 비유한다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것과 같다.
석존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연기를 관찰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연기를 아는 일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비단 근본 불교 뿐 아니라, 그후에 발생한 초기대승, 중기대승, 후기대승에서도 지속적인 관찰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연설은 '다른 것과 서로 관계하여 존재한다'는 것으로 어느 사물이건 그 자체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상주불변(常住不變)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 근본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제법무상(諸法無常 :모든 생각은 항상 변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 모든 행동은 항상 변한다)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는 기독교의 창조론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조론은 절대자에 의해서 모든 사물이 창조 되었다고 함으로써, 상대적인 연기설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창조설은 절대자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고, 단행 되는 것이므로 다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지만, 연기설은 반드시 원인과 조건,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 존재와 소멸을 반복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우리의 전통사상인 개벽과도 상통하는 것인데, 개벽은 시공의 상호관계속에서 모든 사물이 벌어지는 걸 일컫는다.
불교는 이처럼 철저하게 연기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우주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로 이루어졌다는 설이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무조건 전능한 하나님이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에서 모든 걸 만들어냈다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4대가 어울리면서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합리적인 가르침을 전한다.
연기설은 세계와 인생의 일반적인 생멸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기가 말하여진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단순한 일반적인 현상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고뇌가 어떠한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나고 어떠한 인연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가 하는 인생의 고락운명에 관한 것을 밝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연기설이 문제되는 현상은 단순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선악업과 그 과보로서의 고락과 같은 윤리 종교적인 가치관계의 현상이다.
연기의 인과관계에는 과거세로부터 현재, 미래세에 이르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인과업보의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근본불교에서는 연기에 의한 현상간의 관계방식에 대해 상세한 고찰은 하지 않았으나, 후세의 불교에서는 그에 대한 여러 각도에서의 고찰이 행해져 왔다.
불교의 근본주장은 크게 연기설로 일관된 것으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고찰의 각도가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세의 불교에서는 연기설을 협의(狹義)로만 이해하여 연기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 선후가 있는 인과 관계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간에 관계없는 논리적인 연기관계에 대해서는 그것을 연기라고 부르지 않고 실상(實相)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따라서 후세의 불교에서는 연기론과 실상론이 대립하여 양자는 별개의 교학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