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아무 것도 없는 가운 데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는다.
아무 것도 없는데, 도대체 무얼로 천지를 만들 수 있을까?
무언가 재료가 있어야 아무 것이라도 만들 수 있는 게 아닌가?
기독교인들의 논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도깨비가 방망이를 두드리면서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하는 듯 하다.
언젠가 어느 목사와 대담 하는 중에 '첫 날에 하나님이 빛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어느 곳에 만들었다는 말인가요?'
라고 질문을 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그야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지요'라고 대답을 하였다.
나는 그런 말이 성경 어느 구절에 있는 거냐고 다시 물었다.
내 질문이 곤혹스러웠는지 그는 말을 얼버무리면서 급히 자리를 피했다.
사실 나는 그에게 성경의 다음 구절을 보여주려고 했던 건데, 그가 자리를 피하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 고린도후서 4장 6절>
보라!
성경의 창세기 첫 날에 만들었다는 '빛'은 인간의 마음에서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덮어놓고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설득력이 있으며, 합리적인가?
그리고, 그 '빛'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명백히 영적인 빛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어찌하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물질적인 빛까지도 다 혼자서 만든 것처럼 뻥튀기를 하고 있는가?
물론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차원에서 본다면 능히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성경에서 말하려고 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첫 날의 빛을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기 위하여 만들었던 것처럼, 둘째 날의 궁창과 궁창 윗물, 아랫물도 인간의 마음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요, 셋째 날의 '씨 맺는 풀과 나무'도 역시 인간의 마음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넷재 날의 일월성신도 역시 인간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요, 다섯째 날의 바다생물과 공중의 새들도 그렇고, 여섯째 날의 짐승과 인간도 역시 인간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야 일관성이 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글'이라고 하는 이유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곧 사람의 마음에 진리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진리의 빛이 아니면, 그 누구도 성경을 바로 볼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런 면에서 오늘 날의 목자들은 거의가 삯군이다.
요즘 목자들이 세금을 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걸로 세상이 시끄럽다.
일각에서는 그래도 양심적인 목자들이 있어, 교회재정을 투명하게 하고,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기도 한다고 하면서 교회 전체를 매도하지 말라고 하는 부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런 건 운영상의 문제일 따름이지, 결코 성경의 본질적인 문제를 겨냥한 건 아니다.
이를 테면, 곁가지를 붙잡고 싸우는 것이지, 뿌리는 그냥 내버려두고 하는 소리일 따름이다.
기독교의 뿌리를 그대로 두고서는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고 하여도 그 밥에 그 나물이다.
기독교의 문제는 바로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한 데에 있다.
첫 날의 빛을 물질적인 허공 속에서 만들어 낸 것처럼, 육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영영 그들은 처녀가 예수를 낳았으며, 3일 만에 예수의 육체가 부활하였고, 구름 타고 다시 예수가 재림할 날을 기다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 어쩌랴!
누구든 깨달은 자가 있다면 이를 보고 어찌 가만히 있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