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는 진리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진리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성경은 성령의 감동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야 한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태초라고 하면 거의 아득한 옛날을 가리키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태초는 '지금, 여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이사야 43장 13절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과연 태초로 부터 나는 여호와라>고 한 구절에 '태초 = 이제부터'라고 註를 달아 놓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진리는 항상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이미 진실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이 순간'도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 버리며 변하게 마련이다.
변하는 것을 어찌 진실이라고 할 수 있으랴!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특정한 연대를 명기하지 않은 채, 그저 '태초'라고 천지창조의 순간을 표현하였다.
사람의 인체를 놓고 볼 적에, 어느 행동이나 의식을 하는 부위나 시간이 특정한 것이 아닌 것처럼, 천지창조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비록 한 생각이나 행동이라고 하여도 그것이 이뤄지기 까지는 모든 감각기관과 의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굳이 어느 한 부위나 순간이라고 할 필요는 없지 아니한가?
영원은 순간이 모여 이루어진다.
거대한 바다도 물방울 한 개가 모여 이뤄진다.
천지창조도 태초에 이뤄졌고, 첫사람도 태초에 나왔으며, 예수도 태초에 나왔고, 십자가도 태초에 짊어졌으며, 나도 또한 태초에 나왔고, 우리 모두도 역시 태초부터 존재한다.
그럼 성경에서 말하는 태초의 진의는 무얼까?
그것은 한 마디로 '깨닫는 순간'이다.
태초는 '열림'을 의미한다.
닫혔던 것이 열리는 순간! 그것이 바로 태초이며, 개벽이다.
따라서 성경의 태초나 천지창조는 개벽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개벽의 의미를 모르면 태초도 없다.
아무리 우주만물이 삼라만상으로 벌어져도 의식 속에 개벽이 없다면 그건 그저 무덤일 따름이다.
무덤은 시간이나 공간이 없다.
시공이 없는 상태는 태초가 될 수 없다.
태초는 시공의 시작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짐승의 의식에는 개벽도 태초도 없다.
그러니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없는 곳은 땅이며, 흙이다.
그 흙 속에서 지내던 짐승 중에서 성령의 빛을 받아들이면 아담이다.
그것이 바로 첫 사람이다.
그러나 첫 사람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남을 살려주는 영은 아니다.
어리기 때문에 때로는 세상과 타협하고, 뱀의 유혹에 넘어간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성경에서는 '육신'이라고 하였다.
육신에 속한 자는 첫 사람이기에 영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부활이며, 이런 상징적인 사람이 바로 예수다.
첫 사람은 '산 영'이 되었지만, 둘째 사람은 '남을 살려주는 영'이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승리할 적에 이뤄진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즉,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