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곡선생의 말을 들으면서 정도는 불현듯, 인사동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10년 전인가?
그가 어느 학술단체의 간사를 맡아 보던 적이 있었다.
그 모임은 제법 명망 있는 인사들도 참여하는 학술단체였는데, 주로 소멸하는 한국의 민족혼에 관한 발굴과 소개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정도는 그 모임에서 주로 강사 섭외와 주제발표문안의 편집과 계간지 간행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기 때문에, 비교적 소상하게 그들의 주장과 견해에 밝을 수밖에 없었다. 그
들의 주장은 다른 면도 있었지만, 대동소이했었다.
대개의 경우 단군정신이나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등의 소위 민족의 3대 경전의 문구를 많이 인용하였는데, 정도가 보기에도 위대하다고 인정할 만한 내용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접촉하면 할수록 정도는 실망을 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기 때문이었다.
한결같이 ‘단합과 통일’을 강조하면서도 막상 그들은 자신이나 자신들이 속한 단체를 위주로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천부경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던 사람들도 결국은 자신만이 천부경을 알기 때문에, 부득불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부경을 해설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천차만별이었다.
그때마다 정도는 무언가 강력한 구심점이 나오지 않으면 정말로 민족운동은 지리멸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통감하였다.
그가 결정적으로 그 모임에서 손을 떼게 된 것은 그와 같은 현실에 대한 회의감이 갈수록 중첩(重疊)되기 때문이었다.
정도가 운곡선생과 천부동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도, 실은 그가 애타게 찾고 있던 강력한 구심점을 그들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특정한 인물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현무경이라는 개벽주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정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물을 중심으로 삼으면, 고만고만한 견해에 지나지 않았지만, 현무경을 대하면 대할수록 정도는 심연(深淵)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현무경은 천지공사의 결정판(結晶板)입니다. 따라서 현무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천지공사에 대한 의의를 알아야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천지공사는 한 마디로 천지를 뜯어 고친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가리켜 개벽(開闢)이라고도 합니다. 하늘을 열면 개(開)요, 땅을 열면 벽(闢)이라고 합니다. 사람으로 치면 마음을 열면 개라 하고, 몸을 열면 벽이라 합니다. 천지를 연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감이 잡히지 않을 겁니다. 천지의 어느 곳에 문이 있기에 열고, 닫는다고 하는 건지 이상할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과 몸에도 무슨 문이 있어서 열리고, 닫친다고 하는 건가요? 우리는 흔히 ‘마음의 문을 연다’고 합니다. ‘마음의 문이 닫혔다’고도 합니다. 마음의 문을 볼 수 있나요? 혹 육신의 문이라고 하면 입구멍이나, 눈구멍, 콧구멍 등의 구멍이 있으니까 그리로 무언가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걸 볼 수도 있지만, 마음은 무형이기에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그런 표현을 하는 데에는 무언가 근거가 있을 겁니다. 이런 걸 잘 생각해보면 하늘의 문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열고 닫을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인체와 천지를 연결해서 설명하는 운곡선생의 말씀을 듣고 보니 무언가 정도의 의식에 짚이는 게 있었다.
마음의 문이라!
하늘의 문에 있는 것처럼, 마음에도 문이 있다면 … 그건, 10천간에 관한 것이고, 땅의 문은 12지지와 밀접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천간과 지지가 천지의 이치를 밝혀주는 거라고 하신 운곡선생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천간과 지지에 대한 이치를 알아야 하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