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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와 생명과

영부, 精山 2008. 3. 18. 08:58

선악과와 생명과


 선악과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에덴이란 동산이 실제로 중동 어딘 가에 있었고, 그 중앙에 선악나무가 실재했으니, 당연히 선악과도 실재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걸 따 먹게 한 뱀은 악령의 사주를 받은 것이며, 뱀의 유혹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대가로 자손 대대로 원죄가 이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원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를 믿는 길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 본 사람이라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선악과는 실제의 과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수의 다음 말씀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 마태복음 15장 17절 ~ 20절”


만약 선악과가 입으로 들어가는 과일이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사람을 타락하게 할 수 있을까? 선악과의 형상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 창세기 2장 9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하였더라. - 창세기 3장 6절, 7절”


선악과를 먹으니까 그때서야 발가벗은 게 눈에 보인다고 하였으니, 그것을 어찌 육적인 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시력이 나빠도 발가벗었는지, 입었는지는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영적인 의식에서 비롯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선악과는 당연히 영적인 식물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어두운 눈은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요, 그것은 곧 태초에 ‘흑암이 깊고 혼돈하고 공허한 땅’이다. 선악과를 먹은 즉시 인간은 태초에 그들이 나왔던 흙으로 다시 돌아갔다.

선악과와 함께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도 있었다. 만일 선악과가 실제 나무였다면 생명나무도 실제 나무이어야 한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실제 나무가 아니라, 영적인 진리의 나무라는 게 성경 군데군데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소원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 - 잠언 13장 12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이 있도다. - 잠언 3장 18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 계시록 2장 7절”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계시록 22장 2절”


이처럼 성경에서는 무수하게 생명나무를 ‘지혜’ 혹은 ‘진리의 말씀’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에 상대적인 선악과는 ‘불법(不法)’이나 ‘비 진리’라고 해야 한다. 그걸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儀文)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 골로새서 2장 20절 ~ 23절”


의문(儀文)은 문자에 얽매인 의식 곧 율법을 가리킨다. 율법이나 계명에 얽매여 그 속에 깃든 의미를 모르는 상태를 가리켜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證據)한다. 에덴동산이 실제의 특정한 장소를 가리킨 것이 아니기에 당연히 선악과도 특정한 실과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의식의 산물이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생명과나 죽음으로 인도하는 선악과는 항상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깨달음에 의해 결정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