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벨의 제사는 받지 않았을까?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
이 두 아들은 육적인 자식이 아니라, 영적인 자식을 가리킨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물론 실제로 아담과 하와의 몸에서 나온 육신의 자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여도 성경에서 말하는 자녀는 영적인 자녀를 가리킨다.
누구를 통해서 탄생했건, 성경은 그런 걸 기록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태어나고 완성되는 과정을 일러주려고 한다.
그것은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得男)하였다 하니라. - 창세기 4장 1절 ~ 2절”
고 한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했다’고 할 정도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믿고 그를 닮은 자녀를 출산하려는 생활을 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탄생’이다.
이런 까닭에 나중에 두 아들은 각기 하나님께 제물을 바친다.
만약 두 아들이 영적인 자녀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했을까?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영적인 자녀라는 걸 일러준다.
이는 곧 그들 외에도 무수한 가정과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육적인 자녀 곧 짐승을 의미한다.
비록 선악과에 물들었지만,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생활을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서는 견지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두 아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행했던 것인데, 아벨의 제물은 열납(悅納)하였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 가인가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노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창세기 4장 3절 ~ 7절”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의 제물 중에서 한 사람 것만 받아들였다.
형 가인은 이로 인해 아벨을 질투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를 쳐 죽인다.
이 사건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살인 사건이다.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 창세기 4장 8절”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열납 하지 않고, 아벨의 것만 열납 했을까?
가인으로 하여금 심히 분노하게 하여 안색이 변하게까지 할 정도로 편애(偏愛)해야만 했을까?
그 원인은 제물에 있었다.
하나님은 양 고기를 좋아했다는 말일까?
기독교인들은 말하기를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인지라 곡식을 바치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동인지라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바쳤다고 말한다.
물론 그런 기록이 있으니 그렇게 믿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조금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바쳤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냥 곡식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땅의 소산’이라고 한 기록을 간과하면 안 된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이 열납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도 하였는데, 도대체 곡식으로 제물을 바친 것을 가지고, 선악을 논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까?
곡식이건 기름이건 자신의 정성이 들어가면 그만이 아닌가?
사실 하나님은 곡식이건, 고기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보는 건 당연히 진리와 사랑에 입각한 정성과 노력이다.
그런 면에서 아벨은 합격점을 받았고, 가인은 불합격한 것이다.
그냥 곡식이 아니라, 땅의 소산이라고 한 것은, ‘땅’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땅의 소산은 흙의 소산이라는 말이며, 흙의 소산은 어두운 무지의 소산이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 출애굽기 23잘 19절, 에스겔 44장 30절”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 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 출애굽기 13장 15절”
맨 처음 익은 열매를 바치라는 것은 곧 십일조를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은 곡물이건, 짐승이건 맨 처음 것을 바치라고 하였건만, 가인은 맨 처음 것을 바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바쳤다.
맨 처음 것은 무조건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밥을 해도 항상 맨 처음 건 어른께 바치고, 좋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장에게 먼저 보이는 것이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미풍양속이었는데, 성경과 상통한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이것이 십일조의 본래 취지이다.
십일조에 대해서는 다시 상세한 언급이 있을 것이므로 그때 가서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만 가인의 제물을 열납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도 주시해야 한다.
‘ 들에 있을 때’라고 한 것처럼, 집안이 아닌 들판에서 죽였다.
집안은 사람이 안식을 누리는 곳이요, 들은 안식을 누리기 위하여 힘들여 일을 하는 곳이다.
본래 들판은 짐승이 사는 곳인데, 그곳을 사람이 안식하는 곳으로 바꾸기 위하여 일을 하게 되었다.
즉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채소로 바꾸기 위하여 얼굴에 땀이 흐를 정도로 가인은 일을 하여야 했는데, 그만 그런 일을 하는 아벨을 죽이고 말았으니 영적인 살인죄를 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