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의산이 제일 궁금한 모양이었다.
“물론이죠. 그러나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가 포도주와 떡을 돌리면서 ‘이것은 나의 피요, 살이다’고 하지 않았나요? 포도주나 떡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지, 결코 떡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는 아닙니다. 이때의 살과 뼈는 영원한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수와 생명과를 상징합니다. 부활 후에 예수가 말한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있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즉, 너희들이 지금 듣고, 보고, 만지는 모든 것들은 허령(虛靈)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수와 생명과라는 의미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못 자국은 육적인 욕망을 이겨낸 십자가의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런 육신의 흔적이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게 있었다고 하여도, 그걸 통해서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육적인 욕망을 이기는 승리의 상징으로 여기라고 가르치려는 방편으로 나온 것이 십자가와 못 자국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승리는 대단한 겁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는 나무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십무극을 가리키고, 십일귀체한 상태가 승리의 상징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 승리를 얻는 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여러분도 현무경을 공부하고, 이곳 천부동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상의 시련들이 있었던가요? 그건 정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겁니다. 못 자국이나 창 자국은 그런 형극(荊棘)의 길을 이겨 낸 자랑스런 훈장입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그런 신앙을 흠모하면서, 과연 어느 누가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마련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도마였습니다. 도마는 그런 자세한 걸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믿을 수 있는 거라고 하였던 겁니다. 그러나 그런 걸 안 보는 게 사실은 더 행복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시밭길을 본다는 것은 가시밭길을 간다는 것이며, 그건 아주 어려운 고난의 길이기 때문이지요. 굳이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지 않아도, 예수와 같은 분의 말씀만 잘 받아들이고, 믿기만 하면 누구나 부활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시 증산이나 수운선생이나 일부 선생, 녹두장군이 가셨던 고난의 길을 다시 간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또 다시 못이 박히고, 옆구리에 창을 찔리면서 가면 안 됩니다. 즉 손바닥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행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닦아 놓은 탄탄한 길로 가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선각자의 가르침과 도수에만 충실하면 굳이 그런 못 자국과 창 자국을 안 보고서도 얼마든지 십자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증산은 우리를 가리켜 ‘복덩이’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왜냐하면 증산께서는 ‘한고조는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너희는 앉아서 얻는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굳이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지 않아도 우리는 현무경의 용담도와 영부일기를 통해서 얼마든지 천하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행을 얘기한다면 예수 못지않게 동학을 위해서 망나니의 칼날에 흔쾌히 목을 내놓은 수운선생도 계시고, 한 평생 불고가사(不顧家事) 하신 증산 시천주도 계십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서 그런 고통을 당하면서 진리를 추구할 분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무지한 선천의 물질의식에 사로 잡힌 세상이 그분들에게 박은 못 자국과 창 자국이 있었기에, 우리는 직접 그런 시련과 고행을 통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행복하게 현무경을 천지개벽의 이치를 맛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으니 가히 복덩이라고 할 만 하지 않을까요?”
아! 도마에게 ‘안 보고 믿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한 성경의 말씀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정도는 알지 못할 뿌듯함이 가슴에서 솟구치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