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는 알지 못할 뿌듯함이 가슴에서 솟구치는 걸 느꼈다.
뜨거운 기운이 가슴에서 분출되는 걸 억누르고, 옆의 의산을 바라보니 그의 눈에는 살짝 이슬이 비치는 듯 하였다.
정도는 의산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구가 일었지만,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운곡선생의 강좌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조건 안 보고 믿는다는 건 맹종입니다. 길을 갈 적에 무조건 눈을 가리고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날의 현실은 그런 것이 잘 믿는 믿음인 것처럼 오도되고 있으니 서글픈 현실입니다. 여하튼 천지공사는 신명계를 단일화하는 것이 가장 선결조건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통일해야 한다는 게 절대명제인 것과 같습니다. 정신분열증은 상당히 무서운 병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주도 신명들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면 거대한 정신분열증 환자입니다. 물질을 중시하던 선천 지존시대에서는 유, 불, 선이 분열하였으나, 정신을 중시하는 후천 인존시대가 오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증산께서는 공자와 노자, 석가의 도를 멀리하고 새로운 후천의 하나로 귀일한 현무경을 지상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천지공사를 집행할 적에는 반드시 신명을 부르고, 인간의 대표를 불러 한 군데에 모아 놓은 상태에서 일일이 그들의 소견을 물어보고 상의를 하고, 확증을 하였다는 기록이 대순전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자세한 실상은 다시 대순전경 해설 편에서 다루기로 하겠고, 잠시 현무경의 유래에 대한 걸 언급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현무경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증산께서 1909 기유년 설날에 성편을 하셨다는 건 이미 몇 차례 언급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현무경을 증산께서는 법궤(法櫃) 속에 비장(秘藏)한 후,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고수부에게 맡긴 후, 1909년 음 6월 24일 경자일에 증산께서는 화천 하셨습니다. 1913 계축년에 고수부는 정읍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전남 순천 사람인 장기준(張基準 : 호는 師首)이 찾아 와서 말하기를 태을주의 유래(由來)를 알고 싶다고 하였답니다. 장사수는 문둥병을 앓다가 김화숙이란 사람으로부터 태을주를 알게 되어, 일심으로 주송(呪誦)을 한 결과, 씻은 듯이 낫게 되었습니다. 김화숙을 찾아가 태을주의 유래를 물었더니 태운(太雲) 김형렬에게 가보라고 하여 전주로 갔다가 다시 고수부를 찾아 정읍으로 오게 된 장사수와 고수부, 차경석 3인은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이 세분은 1880년 경진 생이었습니다. 장사수는 고수부가 생전에 증산께서 사 준 검은 소를 팔아야 했을 정도로 곤궁한 것을 보고, 다시 검정 소를 사라고 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물쇠가 달린 법궤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고수부가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장사수는 자신이 한 번 자물통을 열어보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생전에 증산께서는 법궤 열쇠를 고수부에게 주면서 ‘후일에 주인이 나타나면 열쇠를 주라’고 하면서 ‘주인이 아닌 자가 열면 벼락 맞는다’는 벼락도수를 붙였었습니다. 그 후에 차경석이 몇 번인가 열려고 하다가 하늘에서 천둥 치는 기미가 보여 무서워서 그만 두었던 적이 있었는데, 장사수에게 고수부가 열쇠를 넘겨주는 것을 보고 차경석이 ‘아무에게나 열쇠를 준다’면서 벌컥 화를 내고 밖으로 나가버렸답니다. 그런데 미처 문을 나서기도 전에 안에서 ‘열렸다’는 환호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차경석이 방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법궤가 열려 있고 그 안에 흰 병이 있었습니다. 흰 병 입구를 막고 있던 병마개를 꺼내 보니 ‘兇花開兇實 吉花開吉實’이라는 10자가 쓰여 있었고, 또 다른 종이에는 ‘律呂度數 安乃成, 布政度數 車京石면, 大學度數 張基準’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병 안에는 현무경 한 권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차경석은 장사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大學度數 張基準’이라고 쓴 문구를 보고서야 비로소 장사수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같이 천하를 도모하자고 하였지만, 장사수는 그의 말과 인품이 정당하지 못한 걸 알고, 현무경을 사본(寫本)하여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갔습니다. 장사수는 그날로부터 현무경을 궁리하였지만, 도저히 그 의미를 풀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전주에서 태운(太雲) 김형렬이 1915년 을묘년에 도통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태운 선생은 모일, 모시에 일본이 망한다고 하면서 전국의 명산 정상에 화둔(火遁 : 불을 묻는 것)을 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약속한 날이 되어도 아무런 일이 없자, 수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하여 떠나고, 장사수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1917년 정사년 3월부터 장사수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현무경을 터득하겠다는 결심으로 제왕봉에 올라가 서전서문을 만독 하는 등, 수도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해 6월 23일에 꿈에 증산께서 나타나 ‘대허(大許)’라는 글자를 내리면서 ‘이제 그만 내려가라’는 명을 받게 됩니다. 그로부터 장사수는 현무경의 오의(奧義)를 알게 되었고, 1920년 경신년 음 4월 5일(황극력 정월)에 후천 5만 년의 처음 법방을 열었습니다. 오늘 아침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