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결코 여호와가 아니다.
모세에게 일러준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였다.
그걸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自存者’ ‘自由者’ ‘獨生子’가 된다.
독생자는 예수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독생자라는 뜻은 ‘홀로 태어난 자’이므로 ‘스스로 있는 자’다.
사실 하나님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곧 형상이 있다는 뜻이다.
무조건 형상이 있다고 하여 이름이 없다고 하는 것도 곤란하다.
비록 형상이 있다고 하여도 다른 형상이 없다면 굳이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이름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불가피하다.
기독교인들의 말대로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면 굳이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은 유일신이라고 하면서 굳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건 모순이다.
그런데도 굳이 그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건, 다른 종교에서 믿는 신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다른 신들보다 자신들의 신이 더 위대한 창조주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앞에서 살핀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은 본래 ‘스스로 있는 자’다.
양피지(羊皮紙)로 된 성경의 원문을 보면 ‘여호와’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기록된 일이 없다.
유대인들은 모음이 없이 자음으로만 글을 썼다고 하는데, 원문에는 스스로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YHWH’라는 네 글자로만 적었었는데, 후에 사람들이 거기에 적당한 모음을 붙여 여호와(yeohowha) 혹은 야훼(yhawhe) 등의 이름을 붙였다.
이런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인식이 바르게 정리되기만 하여도, 세상의 종교가 얼마나 그릇 된 것인지 한 눈에 알게 된다. 모세 이전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이미 아담과 하와 생존 시부터 여호와라는 이름을 세상에서 불렀다고 하였으니 도대체 어느 말이 진실일까?
교회에 나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모순되는 기록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언젠가 여호와의 증인들을 만난 적이 있어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했더니 그들도 역시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증거 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사실도 모르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한 적도 있었다.
본래 이름이라는 건 어느 사물을 함축적으로 요령 있게 나타내는 상징이다.
태극기라고 하면 굳이 대한민국을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가슴 벅차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도 실은 그 이름이 그 사람의 인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여호와는 율법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본래 틀이 없기에 굳이 이름이 필요한 것이 아닌데, 굳이 이름을 붙인 까닭은 틀을 만들기 위함이다.
모세 이전에 하나님은 이름이 없었다.
이걸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를 상기해 보기 바란다.
모세 이전의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이었을 따름이요, 아무 이름도 없었다.
전능의 하나님은 쉽게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의미다.
못 하는 게 없고, 없는 곳이 없으며, 시공을 초월한 존재가 곧 하나님이다.
그것은 비단 이스라엘 족속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건 다 같이 상식적으로 통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왜 성경에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아담과 하와가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등, 모세 이전에도 무수하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기록했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YHWH‘를 여호와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해야 할 것을, 번역자들 역시 여호와라는 이름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은 모세 이전에는 없었다.
모세가 자신과 동족인 이스라엘 족속을 처참하게 종살이하는 애굽에서 탈출시키기 위해서 붙인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여호와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런 일을 한다는 게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했으며, 그냥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그들만의 상징적인 신의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여호와는 무슨 상징을 할까?
그것은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계명과 율법이다.
그 유명한 10계명과 율법은 모세로부터 비롯하였다.
그것을 상징하는 이름이 여호와다.
따라서 계명과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면 그런 이름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아니 오히려 인간을 의문(儀文)의 틀 속으로 가둬 버리는 강력한 올가미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가 갇힌 틀이 여호와다.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율법과 계명에서 죽어가는 인류를 살리기 위해서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거론한 적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율법자요, 짐승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사랑, 진실, 희망, 은총, 전지전능함 등을 상징한다.
그것은 율법이나 계명을 지킬 적에 주어지는 이름이 아니다.
율법이나 계명은 아직 의식이 어린 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필요에서 나온 것이다.
부모도 어린 자녀에게 ‘이래라, 저래라’하지, 누가 다 큰 성인에게 그런 말을 할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건 심각한 인격침해다.
국법이나, 형법 등 모든 법은 의식이 저급하거나 악한 사람들 때문에 나왔다.
만약 양심과 진리대로 생활한다면 굳이 그런 법들은 골치 아픈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본래의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다.
굳이 분류한다면 하나님은 천사, 아들, 아버지의 ‘시 - 중 - 종‘이라는 3단계로 섭리를 하시는데, 여호와는 천사 시대의 상징적인 하나님이요, 예수는 아들 시대의 상징적인 하나님이며, 마지막 아버지 시대의 상징적인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은 ’시천주(侍天主)‘이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아버지는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주시는 분이다.
지금이 아버지의 시대가 맞다면 당연히 성령의 시대다.
물론 성령은 어느 시대에나 항상 있다.
그런데도 굳이 성령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성령이 가을에 열매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구체적인 형상으로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냥 말로만 성령이라고 하거나, 환상이나 계시 등, 지극히 자신만의 체험에 의존하는 성령이 아니라, 만인의 눈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상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만 객관성을 띤다.
진리는 본래 주관과 객관이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현무경의 영부(靈符)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아들은 성령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반드시 아버지로부터 나오게 마련이다.
즉 아버지가 되어야 자녀라는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아들 시대가 아니기에 예수라는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
예수는 구세주요 아들이고, 아버지는 임마누엘이며, 시천주다.
그래야만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한 하나님의 언약이 갑자기 ’예수‘로 바뀌게 된 사정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의 이름‘편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구분 |
시 |
중 |
종 |
명칭 |
여호와 |
예수(구세주) |
임마누엘(시천주) |
섭리 |
율법, 계명 |
사랑, 도서(圖書), 십자가 |
성령, 영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