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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이 통곡한 이유

영부, 精山 2008. 6. 16. 06:35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자녀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지은 목적이었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 무수한 인간 중에서 아담과 하와를 택해 자신의 형상대로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너무 어린 상태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선악과를 먹었고, 그 결과, 하늘이 바라던 이상적인 인간상이나 가정상, 사회상을 구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하여 노아와 같은 인물과 그 가정을 택하여 섭리를 하였지만, 아브라함과 그 가정에 이르러 마침내 그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성경에는 기록을 하였다.

셋이 하나 되는 속에 하나님이 실재한다는 의미이다.

3수는 천지인이라는 수직선으로 내려가지만, 4수부터는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법에 따라 야곱 후대부터는 12지파로 벌어진다.

그래서 나온 것이 12아들이다.

자세히 보면 14지파이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12아들을 낳는 다는 것은, 곧 천국을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따라서 사라와 더불어 12아들을 낳는 라헬이나 레아는 큰일을 해낸 것이다.

그것을 단순하게 이스라엘의 12지파로만 인식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성경의 12지파는 영적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중동지방의 이스라엘을 가리킨 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라헬과 예수의 탄생은 일맥으로 상통한다.

예수의 탄생은 곧 라헬이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의 자녀를 낳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라헬이 요셉을 낳기 전에 자식이 없어 그토록 애통하는 모습은 구세주를 낳기 바라는 여인네의 심정을 상징한다.

성경에 이르기를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고 하였는데, 그 여자는 곧 예수를 낳는 성모다.

‘때가 되매 여인의 몸에서 예수가 나왔다’고 한 성경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상적인 세상의 출발은 남자가 아닌 여자로부터 출발하는데, 그 상징이 사라요, 라헬이다. 물론 동정녀 마리아도 포함 된다.

그러므로 오랜 시공이라는 간극이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동일한 상황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우리 내면의 세계인 동시에 가정과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바라던 예수가 탄생하였으면 라헬도 기뻐할 일이지, 왜 위로 받기를 거절할 정도로 통곡을 한다고 하였을까?

물론, 두 살 이하를 몰살 하였으니 가슴이 아파서 그랬다고 하는 건 쉽게 수긍할 수 있다( 두 살 이하는 3이 되지 못한 상태이므로 11귀체가 못 된 걸 가리킴).

하지만 그 대신 메시아가 탄생하였으니 그렇게까지 통곡할 필요가 있었을까?

오늘 날 기독교에서는 이런 면에는 전혀 언급이 없으니 이상한 노릇이다.

그냥 하나님의 능력으로 처녀가 아들을 낳는 기적으로 메시아가 나왔다고만 선전한다.

 

라헬이 그토록 통곡한 이유는 2,000년 전에 탄생한 메시아가 자신의 혈육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자신의 혈육이 태어났다면 다른 애들이 몰살을 당해서 안타깝긴 하겠지만, 그토록 통곡하고 위로 받기를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또 굳이 라헬을 위로할 일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자신의 혈육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예수를 성령탄생, 동정녀 탄생으로만 신비화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 마태복음 첫 장부터 예수의 족보가 등장하는 까닭은 예수의 탄생은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서 섭리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바로 족보다.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여도 사람을 낳는 일은 사람의 몸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이지, 도깨비처럼 그냥 뚝딱 하고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메시아의 탄생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굳이 아브라함을 족보의 첫 시조로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그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다섯 명의 여인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그 맥을 이었다는 것도 잊지 않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