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표방하는 성경이 이렇듯 모순되는 족보를 굳이 기록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서로 다른 족보 때문에 성경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견해가 대두하자, 성경을 좀 안다고 하는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혈통이나 족보는 허탄한 것'이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의 족보도 역시 그런 범주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런 건 거들떠보지도 말고, 오직 예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허탄한 것이라고 하면서 굳이 서로 맞지도 않는 예수의 족보를 성경에 대대로 기록한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모순투성이이다.
또한 거룩한 예수의 족보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다섯 여인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보아도 성경은 더 없이 진솔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식으로 성경을 무조건 미화하는 일도 너무 흔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왜 그토록 족보에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은 아무래도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는 않을 듯하다.
내 나름대로 짐작되는 것이 있지만, 그런 것은 굳이 말해야 할 필요가 없을 성싶다.
다만 예수의 탄생에 대한 성경의 심오한 뜻을 밝히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예수에 대한 족보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성경이 잘못 됐다고 하는 것도 문제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숲을 보지 않고, 한 그루의 나무만 문제 삼는 것은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예수의 탄생을 그냥 ‘성령으로 낳았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일 일을, 굳이 시비를 야기(惹起)할 우려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이유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예수도 사람의 혈육으로 낳았기 때문’이다. 족보는 혈통을 밝히는 중요한 근거다.
예수의 족보도 예수의 혈통을 밝히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굳이 성령으로 탄생했다고 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예수의 탄생이 일반 사람들의 경우처럼 세속적인 물욕이나, 명예, 가문, 학벌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태초부터 뜻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육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육적인 생각, 즉 악령과 상대적인 의미다.
악령으로 태어난 자는 마귀의 후손이요, 성령으로 태어난 자는 하나님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라디아서 4장 4절)’라는 구절을 잘 생각하면 그 의문이 풀린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여인을 유혹하여 타락하게 한 뱀에게 한 저주와 직결된다. 그 구절을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네가 모든 짐승보다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창세기 3장 14절, 15절’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된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뱀을 더 무서워하게 된 까닭은 하나님이 뱀에게 한 저주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호사가(好事家)들이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여자의 후손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다.
그러니까 예수가 출현하기 전에는 여자의 후손은 없었다.
예수가 오기 전에 있던 무수한 후손들은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 ‘남자의 후손’이었다는 말이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여성인 하와는 본래 남성의 갈빗대로 지어진 ‘남자의 후손’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하와의 몸에서 낳은 자손들이라고 하여도 예수가 오기 전까지는 전부 ‘남자의 후손’이었다고 해야 한다.
예수로부터 비로소 하나님이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이 탄생한 것이며, 그래야만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
뱀의 머리는 곧 뱀의 지혜를 가리킨 것이니, 그릇된 깨달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의미다.
사람은 당연히 아버지인 남자의 후손도 되고, 어머니인 여자의 후손도 된다.
그런데도 굳이 이처럼 성경에서 구분을 하는 이유는, 음의 세상과 양의 세상을 구분하기 위함이다.
즉 남자의 후손은 양의 세상을 지배하고, 여자의 후손은 음의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여자를 유혹한 것이 뱀이라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