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는 어째서 그와 같은 예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됐을까?
이제 그 구절을 인용해 보자.
때는 아하스가 유다 왕으로 재위하던 시절이었다.
주위에 있던 아람 왕과 이스라엘의 왕이 합세하여 유다를 침공하였다.
유대민족은 본래 하나 였으나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유다와 이스라엘로 나누어진 시대였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을 계속하였는데, 이스라엘 왕 베가가 아람 왕과 손을 잡고 유다를 치려고 했던 것이다.
유다 사람들은 그 위세에 눌려 심하게 요동을 했다.
그때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여호와는 아하스에게 적들이 망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말하기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 - 이사야 7장 11절”
고 하였다. 이에 아하스는 말하기를
“나는 구하지 않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나이다 - 이사야 7장 12절”
고 하였다.
이에 이사야가 말하기를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이스라엘 왕과 아람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 이사야 7장 13절 ~ 16절”
유다 왕 아하스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한 것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이사야는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도 모자라서 하나님을 괴롭게 하려느냐?’고 책망을 하였으니 이게 어쩐 일인가?
그것은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나온 소리이기 때문이다.
즉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되 목숨을 다 하여 구하라고 한 것이다.
높은 데나 깊은 데는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다.
오직 목숨을 다하여 구해야 한다는 상징이었다.
그래서 아하스는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이사야가 화를 낼 만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고 한 것이다.
너희가 구하지 않아도 친히 너희에게 주신다고 한 것은 바로 ‘처녀가 아들을 낳는 일’이다.
그것은 그만큼 너희 유다 백성은 타락하여 더럽혀진 여인들이라는 의미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말한 ‘고아와 과부, 창기의 하나님’이다.
그들이 바로 처녀라는 말이다.
그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천대 받을지 모르지만, 타락한 아버지가 없고, 남편이 없으며, 주인이 없는 자들이다.
예수의 탄생은 이렇게 해서 예언이 됐다.
이걸 어찌 육적인 처녀라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2,000년 전의 예수의 탄생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정말로 육적인 처녀가 애를 낳았다고 한다면 무엇 하러 세상에 남자를 만들었단 말인가?
만약 타락한 남자가 겁이 났다면 아예 그런 남자들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남자를 만들면 그만 아닌가? 노아 때에도 무자비하게 다 쓸어버린 하나님이라면 능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일이 아닌가?
물론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후회를 하나님이 했으니 그 약속을 지켜야 하겠지만, 그 역시 상징적인 비유다.
사실 예수가 2,000년 전에 탄생했다는 역사적인 기록은 없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의 실존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수가 실존 인물이라고 하여도 성경은 육적인 탄생이나 부활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존 했건, 안 했건 육적인 기록이라면 결코 성경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