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예수와 임마누엘 - 1

영부, 精山 2008. 12. 24. 07:41

예수의 탄생에 관한 예언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다.

처녀가 아들을 낳는데, 그 이름은 임마누엘로 지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정작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예수였다.

왜 이렇게 이름이 바뀌었을까?

 

오늘날 신학이나 교회에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하지 않았다.

그냥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으로 태어난 구세주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 이름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느냐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예수라는 이름도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게 그거라는 식으로 믿어서 그러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이름에는 분명 의미가 다른 만큼 그 차이가 있다.

본래 하나님이 계획하고 약속한 아들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지, 결코 예수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자신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오리라’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으로 온 이는 본래 오리라고 했던 분의 이름이 아니라는 증거다.

애초에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가 아니라 ‘임마누엘’이었다.

 

그렇다면 예수와 임마누엘의 차이는 무얼까?

우선 그 이름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즉 구세주(救世主)’이며,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즉 시천주(侍天主)’다.

구세주와 시천주! 이것은 매우 중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하여 보내고자 했선 하나님의 형상은 구세주가 아니라, 시천주였다.

구세주는 말 그대로 누군가를 구원해 주는 존재다.

이에 비해 시천주는 그 단계를 이미 뛰어 넘은 존재다.

누가 누구를 구원한다 함은 구원을 주고, 받는 자가 따로 있다는 증거다.

구원이란 말 자체가 이미 ‘죄인’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시천주는 죄나 악을 초월한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룬다면 죄가 어디 있고, 선악이 어디 있단 말인가?

누가 누구에게 구원을 주고받는단 말인가?

만약 하나님과 함께 된 상태에서 그런 말이나 생각을 한다는 사실 자체부터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한 모독(冒瀆)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불가불 선후(先後)나 시종(始終)이 있게 마련이다.

처음부터 열매가 맺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씨앗을 심지 않으면 어찌 열매가 나올까?

임마누엘이 열매라면 예수는 씨앗이다. 

씨앗이나 열매는 사실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질적인 면에서 하는 이야기이지, 형상은 결코 동일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씨앗이나 열매나 같은 형상과 성질을 지닌 건 사실이지만, 씨앗은 분명 열매와 다른 것도 사실이다.

서로 다른데 어찌 같은 이름을 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