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상징이다.
그 옛날 에덴에서 아담이 모든 짐승의 이름을 다 지었다고 하였지만,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
지금도 모르는 짐승의 이름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성경은 비유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의미를 두었다는 뜻이다.
매일 보는 꽃이라고 하여도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천년, 만년 지나도 그 꽃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의미가 밝아진다면 그 때부터 그 꽃에는 이름이 붙게 마련이다.
‘이름’이란 말 자체가 ‘이르렀다’ 즉 ‘깨달았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처럼 ‘이름’은 '깨달음‘ 자체를 가리킨다.
아담이 짐승의 이름을 지었다 함은, 곧 짐승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상태에서 짐승을 바라보니 새로운 의미가 솟아나왔다는 뜻이다.
구세주와 시천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구세주가 아니라 시천주로 사람이 지음 받기를 원했다.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하늘에서 다시 여자의 후손을 보내야 했다.
그 첫 사람이 바로 예수라는 이름인데, 그는 아들의 이름으로 온다.
마지막 열매는 시천주 임마누엘인데,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온다.
오늘은 전 세계가 성탄절로 경하하는 날이다.
예수의 탄생도 불분명한 상태이니, 생일도 조작될 건 당연하다.
12월 25일로 성탄절이 정해지기 전에는 1월 6일이었다.
그것은 통일교의 문선명 교주가 자신의 생일이 1월 6일이라고 하면서 예수의 생일과 자신을 연계하는 것도 흥미스러운 일이다.
문교주의 부인 한학자 여사도 1월 6일인데, 한 분은 양력이요, 한 분은 음력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여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성탄절처럼 분명 잘못 된 것도 힘 있는 사람들이 정해 놓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틀림없는 진실인양 호도(糊塗)되는 것이 이 세상이다.
한 번 그렇게 법으로 정해 놓으니까 전통이 된 것이요, 정말로 그 날에 아기 예수가 세상에 성령으로 태어났다고 믿고 있다.
기독교의 막강한 힘과 돈 앞에서 세계 각국의 정부는 아예 법으로 그 날을 성탄일로 정하였으니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야 할까?
기독교인들이 툭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라고 하던데, 성경에는 분명히 ‘이 세상의 권력은 사탄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성탄절도 사탄이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사탄이 만들었다면 당연히 임마누엘의 때가 되면 성탄절도 시들해지게 마련이다.
요즘의 성탄절은 예전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보라!
앞으로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런 추세로 흐를 것이다.
왜냐하면 열매가 맺히면 쭉정이는 하릴 없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철칙이기 때문이다.
사실 난 그따위 날짜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예수의 생일이 오늘이면 어떻고, 내일이면 어떻다는 말인가?
그것은 성경의 구절에도 있는 것처럼, ‘생일이나 절기 등은 다 허탄한 것’이다.
그런 것은 그저 인간이 생활하기에 필요한 것이다.
그걸 놓고 사탄이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들었다 하는 식으로 다툰다는 건 허송세월일 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 영혼과 자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의 생일은 사실 특정한 날로 못 박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태어나는 거룩한 성령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존재’라는 성경의 말씀은 영원한 진실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를 특정한 날에 태어난 존재로 국한 한다는 자체가 이미 진시로부터 벗어난 일이다.
나는 매일 매일이 성탄절이요, 부활절이다.
그것이 바로 '매일 매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한 바울의 가르침이 아닌가?
남들이 직장에서 세상사와 씨름 할 적에 나는 내 속의 하나님과 함께 한다.
아마 나처럼 하루 일상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거룩하고 신성하게 변해 가는 나를 발견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믿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