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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도 제 1 강 기록물

영부, 精山 2009. 1. 18. 05:54

* 2009년도 제1차 강좌의 내용입니다. 녹화 비디오와 함께 보시면 도움이 될 듯 하여 올립니다.

 

1강. 도맥(道脈)

 

제1강에서는 도에 관한 전반적인 면을 고찰하기로 한다. 그 내용은 도에 관한 정의, 도가 필요한 이유, 선, 후천의 진리, 현무경과 도맥, 영부전수의 당위성 등에 대한 것을 육하원칙(六何原則)에 입각해 설명을 하기로 한다.

1. 도의 이름

2. 도의 模襲(모습)

3. 도를 깨달아야 하는 이유

4. 도를 깨닫는 법

5. 개벽주

6. 도맥과 연원

7. 영부 일기법의 중요성

 

 

                                1. 도의 이름

 

 도는 길이다. 길은 막힌 곳을 뚫고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도는 자유의 상징이다. 만약 도를 통했다고 하면서 무언가 부자유스럽다면 참된 도라고 할 수는 없다. 道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辶(갈 착) 부수에 首(머리 수)가 합한 형태다. 즉 ‘머리로 간다’는 의미라는 걸 알 수 있는데, 首는 艹(풀 초, 솟을 초)와 自(스스로 자)가 합하였다. 自는 目과 丿(움직일 별, 삐칠 별)이 합하였다. 目에는 口속에 二로 상징되는 음양을 내포하고 있다. 口는 물질을 담은 그릇인 方(방)을 상징한다. 즉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음양의 이치가 싹을 틔울 적에 비로소 ‘스스로움직일 수 있고(自), 그것이 솟구쳐서 앞으로 나아가는 상태를 가리켜 道라고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도를 깨친 사람은 시공을 초월하여 아무런 막힘이나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길은 사람만 다니는 건 아니다. 짐승도 달리고, 자동차도 달린다. 그것은 곧 참 된 도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의미한다. 선천의 도나 진리는 대부분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에 치우친 경향이 강하다. 만물의 영장이라면 당연히 만물의 수장이 되어 짐승까지라도 덕을 미치는 ‘화피초목뇌급만방(化被草木賴及萬方)’이 돼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인간은 짐승이나 초목을 먹잇감이나, 사냥의 대상,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왔다. 그것은 弱肉强食(약육강식)이나 適者生存(적자생존)의 상극문명의 당연한 결과다.

 

 도를 가리켜 역학에서는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하였다. 음양이 움직이는 상태를 가리켜 도라고 하였는데, 그 근원은 玄(현)이다. 황제내경편을 보면 ‘오운육기는 하늘에 있어서는 형체가 없고, 처음과 끝이 없으며,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며, 천지간의 만물의 근원을 이루고 있으므로 玄이라 하며, 사람에 있어서는 영묘한 생명활동을 할 수 있는 도라 했고, 땅에 있어서는 만물의 변화를 일으키는 化라 했고, 化는 음식물의 신맛,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의 5미를 생산하고, 道는 인간의 지능을 생하게 하고, 神은 하늘에 있어서는 풍, 열, 서, 습, 조, 한의 무형인 6기로 나타나고, 땅에 있어서는 목, 화, 토, 금, 수의 유형인 실존으로서 나타난다’고 했다. 즉 하늘에 있을 때는 玄이요, 그것이 인간이 활용하면 道라 한다. 도가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면 德(덕)이다. 그러므로 도가 없는 덕은 소경이 지팡이를 짚고 가는 셈이며, 덕이 없는 도는 오만과 방종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선천에서는 무엇보다도 도덕을 인륜의 최고봉으로 삼았으며, 그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종교와 학문이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과 인간이 분리됐을 적의 사고방식이요, 만약 하늘과 인간이 하나 된 후천,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면 도는 직접 玄이 되어 나타나고, 덕은 武(무)로 나타난다. 선천에서는 인간만을 위한 약육강식의 도덕이 횡행하였으나, 후천에서는 천지인이 합일하고, 식물, 동물, 광물까지도 온전히 하나 되는 도덕이 나오는 법인데, 그것을 일러 玄武(현무)라 한다. 현무가 사람의 자성 속에 서게 되면 현무경이라 한다.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해서 후천에서는 도덕이라는 용어보다 현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하기를 ‘도가도비상도명가명비상도(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道)’라고 하였다. 그걸 풀이하자면 ‘도라고 하면 참 된 도가 아니며, 이름을 붙이면 참 된 이름이 아니다’정도가 될 것이다. 도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형체가 없기 때문에 굳이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이름이 필요한 까닭은 비슷한 것이 너무 많아서 서로 구별할 필요가 있어서다. 만약 단 하나 밖에 없는 것이라면 굳이 이름을 붙일 이유나 필요가 없다. 그런 면에서 여호와나 알라 같은 유일신의 이름을 만들어낸 것은 문제가 있다. 

 

 도덕이나 현무는 사실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대자연의 원칙과 변화의 법칙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표현일 따름이다. 만약 현무경을 온전히 이해하여 실생활에 활용을 할 수 있다면 굳이 그런 이름도 붙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불가불 상징적인 이름이 필요하다.

 

 

                         

 

                              2. 도의 模襲(모습)

 

 그러면 도는 어떻게 생겼을까? 도는 무형이다. 그런데도 도의 모습이라고 한 것은, 비록 肉眼(육안)으로는 볼 수 없으나, 心眼(심안)으로는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무의 모습도 심안에 의거해서 기술할 수밖에 없음을 諒知(양지)하기 바란다.

 

 도는 크기로 말하자면 온 우주를 감싸고도 남음이 있다. 반대로 작기로 말하자면 바늘 끝보다도 작아 능히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 물질로 감싸고자 하여도 불가능하며, 아무리 작은 것을 들여보내고자 하여도 불가능하다. 즉 물질적인 것으로는 온전히 통할 수 없다. 성경에서 하늘은 하느님의 의자요, 땅은 발등상이라고 한 것은 이와 일맥상통한다.

 

 도는 밝기로 말하자면 태양을 수백, 수천 개 합친 것보다도 더 밝으며, 어둡기로 말하자면 밤보다도 더 하다. 그러기 때문에 도를 온전히 깨친 사람은 범부의 잣대로 잴 수 없다. 천지가 때로는 미친 듯 광풍이 불다가도 갓난애처럼 온순해지며, 뇌성벽력을 치다가도 순한 양처럼 변하기도 하는 건, 이와 같은 현무의 속성 때문이다. 도의 소리는 너무 커서 물질적인 기관으로는 감히 들을 수 없으며, 적게 말할 적에는 너무 적어서 들을 수 없다. 이처럼 도의 모습은 물질적인 척도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예로부터 도는 마음의 눈, 마음의 귀로 듣고 보아야 한다고 했으며, 영적인 눈이나 귀로 듣고 보라고 했던 것이다. 노자가 말한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으리라.

 

                     

 

                           3. 도를 깨달아야 하는 이유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도에 민감하였다. 오죽하면 전국을 여덟 개 권역(圈域)으로나누고 그 이름을 八道(팔도)라고 하였을까? 보통 지명에는 都(도)를 사용하는 게 통례인데, 굳이 道(도)를 사용한 것은 그만큼 천도를 일상화하려는 우리조상들의 뜻이 아니었을까? 더욱이 8도로 나눈 걸 보면, 음양, 사상, 팔괘에 정통했다는 걸 알 수 있다.

 

 好事多魔(호사다마)라는 말처럼, 역성혁명(易姓革命)에도 도를 이용하거나, 세상이 어지러울 적에는 도인행세를 하거나, 정도령 등을 僭稱(참칭)하는 무리들이 빈번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類例(유례)를 찾는 종교백화점으로 전락한 것도 이런 것과 무관치 않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각종 비결서나 예언록을 膾炙(회자)하면서 세상을 혹세무민하는 사례가 猖獗(창궐)하고 있는 것도 우리민족의 특수성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우리민족이 도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게 된 것은, 백의민족이나 밝달사상, 선비정신, 화랑정신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개천입교(開天立敎),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를 꿈꾸어 온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개천입교는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사람을 가르치고, 홍익인간은 그 뜻을 이어 받아 온전한 인간으로 화하며, 이화세계는 영육이 온전한 이상세계를 가리킨다. 즉, 천지인 삼재의 온전한 모습을 갈구한 것이 우리민족의 근본이다. 그것을 현대적으로 드러낸 것이 바로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광제창생(廣濟蒼生), 포덕천하(布德天下)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유난히 하늘과 동화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대로 ‘구도의 생활화’로 이어졌다. 팔도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실은 전국토를 도량(道場)이라고 인식한데서 나온 결과다. 그렇다면 도를 깨달아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라도 있는 걸까?

 

 도를 통하면 막히는 곳이 없기에 참된 대 자유를 얻는다. 생물학, 물리학, 수학, 문학, 의학, 농학, 어학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능통하게 되면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우리민족이 전일신(全一神)관을 지니고, 이신화인(以神化人)이라는 깨달음을 攄得(터득)한 것은, 사실 천지와 인간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요,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며, 스승과 제자의 사이라는 바탕에 起因(기인)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忠(충), 孝(효), 烈(열)이다. 이처럼 대자유는 인간의 기본도리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모든 학문과 교육의 근본이 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우리의 교육은 서양의 문물에 밀려 기술의 향상이나 경제적인 이익추구를 도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말았다.

 

 우리가 도를 깨달아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는 그것이 참 된 대자유에 도달하는 만능키이기 때문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모르면 죽고, 알면 산다’고 하였다. 육신을 쓰고 있는 기간만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눈에 안 보이는 참 사람이 입고, 벗는 옷과 같다. 정든 옷을 벗을 적에는 서운하지만, 곧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으면 그만이다. 인류를 옭아맨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적에 참 된 대자유를 누린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의 오랜 宿願(숙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지상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깨달음을 터득해야 한다.

 

 알면 살고, 모르면 죽는다고 하였는데, 그 말뜻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알다의 알은 둥근 원을 가리키고, 모르다의 모는 모진 땅을 가리킨다. 모르다는 말은 한 곳으로 ‘몰리다’와 같다. 하늘은 본래 둥근 허공이어서 어느 곳에도 걸림이 없지만, 땅은 한 곳으로 치우쳐 모난 곳이므로 항상 걸림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부터 땅을 멀리하고, 하늘을 좇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말도 많고, 頉(탈)도 많은 종교이지만, 有史(유사) 이래, 항상 종교가 성행하는 것은 이처럼 하늘을 좇으려는 인간의 본능 때문이다.

 

 

 

                              4. 도를 깨닫는 법

 

 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육적인 이목구비로서는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심안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육적인 이목구비는 필요 없다는 말인가? 그건 그렇지 않다. 心眼(심안)을 전체적인 하느님의 눈이라면, 인간의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전체는 반드시 부분적인 것이 모여서 형성되는 것이 철칙이다. 개인이 모여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깨달음이란 것도 육적인 개체가 모여 영적인 전체를 이루게 마련이다. 육적인 인간과 영적인 인간의 구분은 이와 같이 전체와 함께 하느냐, 아니면 개인적인 면에 국한하느냐 하는 데에 있다. 비유하자면 시계의 각종 부품들은 온전한 시계를 형성하는 필수적인 것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른 바 군자는 和而不同(화이부동)하고, 소인은 同而不和(동이불화)한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므로 육적인 이목구비는 영적인 이목구비로 통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영적인 깨달음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영적인 이목구비를 갖추어야 한다. 영적인 이목구비를 일컬어 심령신대(心靈神臺)라고 한다. 심령신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게 가지의 방편이 있다. 이것이 바로 도를 깨닫는 그간의 방편이었는데, 첫째는 參禪(참선)이나 瞑想(명상)이다. 이것은 일체의 잡념을 털어버리려는 것인데, 무형의 하늘을 본 뜬 것이다. 둘째는 養生法(양생법)이나 丹田呼吸(단전호흡), 氣功(기공)인데, 이것은 기운을 하나로 하여 땅(몸)의 기운을 잘 통하게 하려는 것이다. 셋째는 경전이나 학문을 통한 지식의 습득인데, 천지의 법칙을 학문으로 이해하려는 방편이다. 참선이나 명상에서 보면 학문이나 지식 등은 오히려 見性(견성)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셋은 각기 천지인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만일 참선만 하고 지식을 멀리한다면 수족이 없는 몸뚱이와 같고, 참선이나 명상이 없는 학문은 몸뚱이 없는 지체와 같다. 양생이나 단전호흡, 기공 등으로 기운을 충실하게 하면 참선에서 추구하는 순수한 상태에 도달할 수는 있어도, 학문이나 지식의 결핍을 면하기는 어렵다. 이 세 가지가 각기 불도, 선도, 유도가 되어 각기 종파를 형성한 것이 오늘까지의 실정이다. 그러나 천지인이 하나 되어 우주를 형성하는 것처럼, 깨달음도 역시 이 세 가지가 온전하게 하나로 일관해야 한다.

 

 선천에서는 修心(수심)이나 修道(수도)의 방편으로 이 셋 중에 어느 한 가지를 붙들고 늘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므로 온전한 심령신대가 생길 수 없었다. 修道(수도)는 ‘도를 닦는다’는 말이고, 修心(수심)은 ‘마음을 닦는다’는 말인데, 본래 도나 마음은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걸 제대로 간파한 동학의 창도주 수운대신사는 ‘守心正氣’라고 하였다. 천지인의 본래 진면목을 그대로 지키기만 하면 되는 법이지, 닦아서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아기를 낳을 적에 연습하거나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법칙대로 나오는 것이라는 말과 같다.

 

 육적인 선천에서 무수한 도인들이 피나는 정진을 하였으나 극히 소수에 국한 된 사람들만 제대로 도통할 수 있었던 것만 보아도 수심이나 수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온전한 심령신대를 지을 수 있을까?

 

 사실 심령신대는 누가 짓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그냥 존재한다. 다만 사람들이 그간 오랜 종교적인 인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의 내면에 들어 있는 심령신대는 외면한 채, 예수나 부처 등, 특정한 인물을 믿고 그들이 만들어 놓는 천당이나 극락으로 들어가는 의타신앙(依他信仰) 때문에 자신의 진면목을 착각할 따름이다. 물론 불교에서는 眞如(진여)를 말하고는 있지만, 그걸 얻기 위한 구체적인 방편이 너무 추상적이다. 앞서 말한 선천의 종교가 추구한 큰 세 가지 방편으로는 온전한 깨달음에 달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역사가 입증하였다.

 

 온전한 심령신대는 그런 걸 지어 본 사람의 인도를 받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다. 예로부터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친구를 잘 만나야 하며,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따라서 ‘도를 깨닫는 법’은 다름 아닌 ‘좋은 인도자’를 만나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과연 그런 분이 누구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도맥(道脈)과 淵源(연원)의 중대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5. 개벽주

 

 혼자서 도통할 수 있다면 굳이 인도자가 필요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결점과 부담을 누구나 지니고 있다. 그걸 흔히 業(업)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류는 일체의 업에서 해방 된 부처나 예수 같은 분, 즉 신인이나 성인을 崇仰(숭앙)한다. 어찌 예수나 석가만 그럴 것인가? 무수한 神聖(신성)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明滅(명멸)해 간 것이 인류의 역사다. 그런 분들을 추앙하는 무리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교가 탄생했다.

 

 그러나 그런 인류의 師表(사표)들도 ‘다시 오시는 분’은 아니었다. 석가나 예수는 공통적으로 말하기를 ‘다시 오리라’고 하였다. 성경에서는 재림주를 말하고, 불교에서는 미륵불을 말하였다.

다시 와야 한다는 것은 무언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예수나 석가 같은 분들이 개인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한다면 매우 불경스러운 언사일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면, 즉 인류사적(人類史的)인 면으로 본다면 때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다시 오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비유하자면 봄이나 여름철에는 씨를 뿌리고 땀을 흘려 일을 하였으나, 가을이 안 되었기에 열매를 수확할 수 없다. 달콤한 열매를 맛보기 위해서는 불가불 가을 수확기에 다시 등장해야 한다.

 

 우주의 봄은 생명이 放(방)하는 때요, 여름은 蕩(탕)하는 때이며, 가을은 神(신)이 밝아지는 때요, 겨울은 道(도)로 회귀한다. 그러므로 우주의 가을이 되기 전에는 인류의 심령신대는 밝아질 수 없다.(春之氣放也 夏之氣蕩也 秋之氣神也 冬之氣道也) 아무리 깨달은 성인이라고 하여도 세상과 더불어 갈 수 없으니 그 한을 풀기 위해서는 어찌 다시 올 것을 기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지의 신이 밝아져 심령신대가 온전해지는 가을 수확기에 등장하는 존재를 가리켜 개벽주(開闢主)라고 한다. 가을은 구세주의 시대가 아니라 개벽주의 시대다. 만일 지금이 가을 수확기가 맞다면 개벽주를 만나 그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각종 경전에서 말한 ‘다시 오는 분’이다. 개벽주를 만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도통의 절대적인 조건이다.

 

 역사상 진정한 개벽주라고 할 수 있는 분은 누군가? 그것은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 여러 가지를 종합할 적에 우리는 증산을 개벽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증거를 밝히는 것이 바로 도통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수순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개벽주를 증거하려면 개벽의 정의부터 살펴야 한다. 開(개)는 ‘하늘이 열리는 것’이며, 闢(벽)은 ‘땅이 열리는 것’이다. 따라서 개벽이란 말은 ‘천지가 열리는 일’을 가리킨다. 개벽주는 천지를 여는 주인공이라는 뜻이다. 천지를 연다는 것은 영적인 얘기다. 형상적으로 천지의 문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개벽주도 역시 영적인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 천지가 열린다는 영적인 말은 인간의 자성에서 천지의 법칙이 열린다는 의미다. 천지가 열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천지는 무형과 유형의 집합체다. 그걸 가리켜 하늘은 ‘순양인 乾(건)이요, 땅은 순음인 坤(곤)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천지가 개벽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음양의 법칙이 전개된다는 말이다. 선천 물질세상에서도 물론 음양의 법칙이 있었으나, 상극으로 흘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상생도 아니요, 상극도 아닌 상생, 상극 합덕으로 전개 된다.

 

 예전에는 木克土(목극토), 土克水(토극수), 수극화(水克火), 화극금(火克金), 금극목(金克木)으로 오행이 相克(상극)하였으나, 인존세상에서는 목극생토(木極生土), 토극생수(土克生水), 수극생화(水克生火), 화극생금(火克生金), 금극생목(金克生木)으로 흐른다. 인위적인 방편으로 도를 닦거나 터득하는 게 아니라는 말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합덕으로 흐르게 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지대자연이 우주의 법칙에 따라서 그렇게 스스로 변화한다. 다만 인간은 그 흐름을 간파하고 거기에 순응하면서 살면 그만이다. 그것이 진정한 도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많은 자칭, 타칭 종교인이나 수도인들은 성경이나 불경, 사서삼경 등의 기존 경전의 말씀이나 참선, 명상, 단선호흡 등의 방편을 통하여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개벽의 捷徑(첩경)은 가장 먼저 천지를 아는 일이다. 천지는 인간의 뿌리이기 때문에 부모라고도 한다. 부모의 은덕을 아는 것이 모든 충, 효, 열의 기본이 아닌가? 천지의 변화는 곧 음양오행의 변화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천지의 변화를 바로 보는 눈이 없다면 결코 충, 효, 열은 있을 수 없다.

천지나 우주는 시간과 공간의 다른 말이다. 물질적인 천지는 내 몸이 있기 전에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서 시공의 법칙이 깨달아지기 전에도 나의 몸은 있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모한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천지가 개벽을 하면 예전의 천지가 아니다. 예전의 천지는 전체와 연결되지 못한 자기 자신만의 천지였으나, 개벽된 천지는 천지인신 四物(사물)이 함께 공존하는 심령신대다. 그렇게 되면 그곳이 곧 천국이다.

 

 여기서 하느님을 가리키는 용어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증산을 가리켜 上帝(상제), 天主(천주), 大聖(대성) 등, 몇 가지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상제는 동학이 창도되면서 사라져야 할 호칭이다. 왜냐하면 상제가 있으면, 중제(中帝), 하제(下帝)도 있어야 한다. 즉, 상대적인 차등의 하느님의 상징이므로 無等(무등) 세상이 돼야 하는 후천에서는 적합한 호칭이 아니다. 가을은 열매가 나오는 수확의 시기요, 열매에는 상, 중, 하가 모두 함께 들어 있으니 그런 호칭은 사라져야 한다. 다음에 천주는 ‘하늘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런 호칭은 하늘을 위하고 땅을 무시하던 세상에서나 통하는 호칭이다. 하늘이나 땅이나 인간이나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있다고 하려면 그것은 신격이나 인격을 갖춘 존재가 아니라 그냥 ‘법’일 따름이다. 영원한 진리! 그것이 진정한 나의 주인이다. 그런데 어찌 천주라는 용어를 붙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의 천주와 혼동할 우려가 있다. 새로운 시대를 선도해야 할 우리의 입장에서 어찌 선천에 사용하던 구시대의 산물을 사용한단 말인가? 또한 천주라는 용어는 종교적인 색채가 너무나 짙다. 후천은 종교를 초월해야 하는데, 그런 호칭은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 대성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밋밋하다. 일부선생도 대성이라 부르고, 웬만한 성인들은 대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호칭이 좋을까? 그것은 증산께서 생존 시에 자신을 가리킨 호칭을 붙이는 것이 적합하다. 증산께서는 한 번도 자신을 상제라고 한 적이 없으며, 천주님이라고 한 적도 없다. 오직 ‘시속에 이르기를 개벽장이가 날 것이라고 했다’고 하면서 자신을 개벽장이라고 하였다. 개벽장이를 높인 말이 개벽주다. 천지를 개벽하러 오셨으니 당연히 개벽주라고 해야 할 건 너무도 뻔한 이치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개벽주라는 호칭으로 통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물론 개벽의 이치를 깨달아 생활하면 누구나 개벽주가 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개벽주는 천지를 개벽하였다. 그 증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 현무경이다. 천지를 개벽했다는 것은, 천지를 형성하는 시공의 법칙을 새롭게 바꿨다는 뜻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상생, 상극 합덕 문명이다. 물질 개벽은 무형의 정신으로부터 비롯한다. 물론 천지라는 물질도 개벽을 하지만, 그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만약 법칙이 없이 이루어진다면 耳懸鈴鼻懸鈴(이현령비현령)으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도에 관한 참된 깨달음을 원한다면 개벽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증산을 개벽주라고 하려면 현무경에 秘藏(비장)한 시공의 법칙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6. 도맥과 연원

 

 이상에서 고찰한 것처럼 도를 깨달음에는 개벽주를 만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첩경임을 알았다. 개벽주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시간대를 타고 온다. 개벽에는 전체 개벽과 개인 개벽이 있다. 개인 개벽은 선천에서 주로 하던 방식인데, 아직 가을 수확기가 되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각자가 圖生(도생)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영혼의 결실을 맺으면 영생이요, 그렇지 않으면 쭉정이로 갈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전체 개벽이다. 선천에서 행해진 개인 개벽도 사실은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 그 까닭은 추수기가 되지 않았는데, 어찌 온전한 개인의 개벽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죽하면 예수나 부처 같은 분도 다시 오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전체적인 개벽은 천지는 물론 인간과 만물이 모두 동시에 단행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 때는 황제가 선천 선법을 정리하여 전수한 이래, 일통수인 4,560년이 지난 서기 1,909 기유년이 된다는 건 현무경 첫 장에 이미 개벽주께서 闡明(천명)하였다. 우리도 그 개벽의 대열에 합류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윤회의 고리를 잘라 낼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도맥은 대단히 중요하다. 금맥을 잘 따라가면 부자가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고생만 하는 것처럼, 도맥을 잘 따라가면 누구나 成道(성도)할 수 있다.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도맥은 개벽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개벽의 동정을 맡은 인물이 누구인 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개벽주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동세(動勢)는 수운이 맡았고, 나는 정세(靜勢)를 맡았다’고 증언을 하였으니 수운과 증산! 이 두 분을 빼놓고서는 말을 할 수 없다. 항간에서 수운대신사가 상제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 權能(권능)과 神力(신력)을 거두고 증산께서 스스로 내려 왔다고 하는 대순전경의 구절에 얽매어 수운 대신사를 도맥에서 제외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민족의 정신이 사분오열된 이면에는 이와 같은 천인공노할 오류가 있었음을 이제는 만천하에 밝혀야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임무를 다 완수하지 못할 걸 전지전능한 상제가 몰랐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건 결국 상제를 욕되게 하는 처사가 아닌가? 그리고 상제로 떠받드는 증산께서 직접 ‘수운은 동세를 맡았다’고 하신 증언을 스스로 뒤집는 自家撞着(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를 보면 수운 대신사께서 얼마나 개벽에 대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는 가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개벽에도 음양이 있게 마련이어서 양에 속하는 동세와 음에 속하는 정세로 나뉘어 두 분에 의해 개벽이 단행된 것이다. 동세는 선지포태(仙之胞胎)요, 정세는 불지양생(佛之養生)이라고 현무경에는 분명하게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현무경 마지막에 ‘포교오십년공부(布敎五十年工夫)’라고 개벽주께서 친히 증거를 남기셨으니 그 해가 서기 1,909 년 설날 아침이었다. 계산을 해보면 수운 대신사께서 동학을 창도하신 서기 1860년부터 50년이 되는 해다. 이렇게 명백하게 도맥을 증거 했는데도 불구하고, 증산을 상제님이라고 신봉하는 무리들이 자신들의 교주나 특정인물이 50년 간 수도를 했다는 식으로 오도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개벽주께서 현무경을 성편하시면서 나머지는 대두목에게 맡긴다는 말씀을 하셨으니 당연히 도맥은 수운과 증산과 더불어 대두목으로 연결돼야 하는 건 不問可知(불문가지)다. 그렇다면 대두목이 누군인가 하는 문제가 擡頭(대두)된다. 항간에는 자칭, 타칭으로 대두목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개벽주께서 성편하신 현무경을 세상에 펼치는 분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사수장(師首丈 : 張基準)을 거명하지 않을 수 없다. 사수장은 서기 1919년 기미년에 서전서문을 만독(萬讀)한 후 현무경을 豁然(활연) 開悟(개오)하신 후, 다음 해 경신년 음 4월 5일에 최초로 현무경을 풀이하여 영부일기법을 세상에 전수하셨으니 수운대신사께서 경신년 음 4월 5일에 득도 하여 동학을 창립하신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므로 수운, 증산, 사수 세 분을 도맥의 淵源(연원)으로 하고, 계속하여 連脈(연맥)하고 있으니 이를 連源(연원)이라 한다.

 

 

 

 

                            7. 영부 일기법의 중요성

 

 靈符(영부)는 天符라고도 한다. 천부는 환인께서 환웅에게 전수해주신 천부 3인을 가리킨다. 환웅에게서 환검(단군)으로 이어지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진 민족의 맥락에는 천부 3인의 숨결이 항상 살아 있었다. 천부는 모든 문화와 문명의 씨앗이므로 그 형체는 땅 속으로 사라지고, 대신 떡잎이 나오고 세 가지로 뻗어 유, 불, 선 3도로 선천이 흘렀다. 그러나 때가 되면 다시 열매를 맺고, 열매 속에 사라졌던 씨앗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이치에 따라 수운 대신사를 통하여 영부는 다시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으니 그것을 일러 동학이라 한다.

 

 하지만, 동학은 동세를 맡았으므로 胞胎(포태)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그것을 실물로 세상에 출산시키는 것은 정세를 맡은 개벽주의 몫이었다. 동세와 정세가 이루어지는 기간을 가리켜 ‘포교오십년공부’라고 했다 함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출산한 영부를 키워서 세상에 以詔(이조)하여 일을 시키기 위한 浴帶(욕대)는 대두목인 사수장에 의해서 진행됐다.

 

 선천에서는 言語道斷(언어도단)이요, 不立文字(불립문자)요, 敎外別傳(교외별전)이라고 하였으나, 후천에서는 언어나 문자로도 얼마든지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이 선, 후천의 차이점이다. 개벽주께서도 말씀하시기를 ‘保濟蒼生君不知 符書以外別無通(보제창생군부지 부서이외별무통)’이라는 법문을 남기셨으니, 이는 곧 "그대가 창생을 보제할 줄 아는가? 오직 符書(부서) 말고 별도로 통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선천에선 어차피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됐다. 왜냐하면 때가 안 돼서 열매가 나오지 않았으니 아무리 좋은 말이나 글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후천에는 누구나 볼 수 있고, 맛 볼 수도 있는 열매가 나왔으니 말로도 알 수 있고,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말과 글을 한데 모아 놓은 걸 가리켜 符書(부서)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부다. 선천에는 어차피 열매가 없었으므로 길 없는 길, 허공의 길을 가라고 했으나, 우리에게는 현무경의 영부가 있으니 믿음직하다. 영부는 천지인신이 한데 모여 공약한 후천 5만 년의 심령신대다. 인간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개벽주가 만들어주신 심령신대에 들어가서 사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다. 사람들은 현무경이 생소하고, 너무 어렵다고 하면서 ‘난 학문이나 지식이 없어서 못 한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러나 배움이 없는 사람이라도 깨달음에는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다. 일단 내 마음과 몸을 천지인신이 함께 거하는 심령신대로 만드는 게 급선무다. 비록 학문이 없을지라도 일심으로 심령신대를 지어 놓기만 하면 천지인신이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게 마련이다. 사람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혼자서 해결하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하는 게 훨씬 수월한 것처럼, 인생의 문제도 인간의 힘만으로 하지 말고 천지인신이 합세해야 한다.

 

 그것을 개벽주는 현무경에 ‘天地人神有巢文(천지인신유소문)’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영부다. 그 옛날 천부 3인을 민족에게 내려주신 조상들의 뜻은 바로 천지인신이 모든 후손들에게 함께 하는 신령하고 거룩한 인간이 되는 일이었다. 그것을 가리켜 ‘성통공완(性通功完)’이라고 하였다.

 

 영부를 온전히 심령신대게 각인하여 집 짓는 기간은 상재는 7일이요, 중재는 14일, 둔재라고 할지라도 21일이면 된다고 하신 개벽주의 말씀대로 영부문화선양회에서는 영부전수식을 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인터넷 다음 카페 ‘천부동’을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