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튼 예수는 사두개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고 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고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를 해야 한다.
무수한 선지자와 조상 중에서 왜 세 사람에 국한한 하나님이라고 했는지,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천명한 대로 그들이 바로 영적인 믿음의 조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랐던 것은 개인적인 사리사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출현과 그런 인간이 모인 가정, 그런 가정이 모인 씨족, 그런 씨족이 모인 부족, 그런 부족이 더 발전한 민족과 세계 인류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즉 아담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무수한 영들이 다 ‘죽은 영‘이었을 적에 ’산 영‘으로 거듭난 아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펼치려고 했던 것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그 초석을 놓았기 때문이다.
아담이 산 영으로 태어나기 전에는 이 세상에 하나님도 없었다.
물론 하나님은 아담이 있건, 없건 존재한다고 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으나 인간의 의식에는 없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예수를 부활시키려고 한 것도, 실은 하나님이 부활하기 위한 목적에 의해서다.
인간의 의식에서 부활하지 못하는 하나님이라면 죽은 하나님이나 마찬가지다.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다’고 한 말을 잘 음미해야 한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사람을 흙으로 짓고 코에 기운을 불어넣으니 ‘生靈(생령)’이 됐다고 한 걸 상기해보라!
생령은 ‘산영‘이다.
아담 이전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산영이 아니라 죽은 영, 즉 죽은 자라는 걸 알아야 한다.
죽은 자는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기에, 산영인 아담으로부터 창조를 한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사람의 형상은 아담 이전에도 무수하게 많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성경은 영적인 사람의 창조를 가리킨 것이기에 육신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아담 이전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예수)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 49절”
아담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으나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면할 수 없었다.
그가 진정으로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생명과’를 먹어야 하는데, 선악과를 먹었기에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역사를 보여주어야 했던 것은, 이와 같은 흙에서 하늘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인류에게 본으로 보여주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가장 핵심이다. 흙에 속한 자는 부활이 없다.
그런 자들은 살았으나 죽은 자다.
‘산 영‘과 ’살려주는 영‘에 대한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
산 영은 물론 죽은 영에서 한 단계 나은 상태이지만, 결코 만족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갓 출발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만족한 상태에 이르면 ’살려 주는 영‘으로 화해야 한다.
’산 영‘은 자신의 목숨에만 국한되지만, ’살려 주는 영’은 자신은 물론 남의 목숨도 살려준다.
그것이 바로 시천주다. 산 영에서 살려 주는 영의 과정을 걷는 이가 아들이며, 구세주다.
온전히 살려 주는 영이 되면 아버지요, 시천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