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
사라는 내 옆지기다. 82년도에 결혼을 하였으니 28년 째 같이 살고 있다. 긴 세월도 같고, 짧은 세월도 같다. 바로 엊그제 결혼 한 것 같은데, 벌써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허허 !
어제 인왕산 정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앉아 있자니, 사라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건 감동적인 순간이리라. 그런 면에서 사라와의 만남은 매우 이색적이면서도 소중하다. 가을이 깊어가고, 애기 손 같은 붉은 단풍잎들을 보고 있자니 글의 세계 회원님들과 막걸리를 한 잔 하면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
그 때 내 나이는 31세, 사라는 29세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나는 툭하면 산에 들어가 나만의 생각에 깊이 잠기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도 명절 때가 되면 집에 들르곤 하였는데, 집에 있건, 산에 있건, 나는 항상 글을 쓰는 게 취미였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가 되고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낳는 체험을 나는 많이 하였다. 그때 썼던 글들, 또 군대에 있을 때에 썼던 글들은 지금도 사라가 보관해 두었다.
그때가 설날로 기억한다. 오랜 만에 집에서 조용히 앉아 소반을 펴 놓고 글을 쓰고 있었다. 그때
“순덕이 있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 밖에는 크고 맑은 눈을 지니고, 머리를 길게 땋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순덕이는 내 누이동생 이름이다.
“지금 외출하고 없어요”
내 대답에 아가씨는 인사를 하고 대문으로 걸어갔다. 그대로 갔으면 아마 사라와 나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아가씨는 다시 내게로 걸어왔다.
“성경 공부하세요?”
나는 그때에 성경을 펼쳐 놓고 글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저어,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나요?”
“암튼 들어오세요.”
조심스럽게 들어 온 그녀의 얼굴에는 유난히 조심스러워 하는 느낌이 역력했다.
“무슨 질문인가요?”
“저는 여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교회에 안 나간 적이 없어요. 지금은 목사님 자녀들을 지도하는 과외교사도 하고, 주일학교 선생님도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학생들한테 성경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곤 하는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거든요.”
“그게 뭔데요?”
“다윗과 골리앗에 관한 이야긴데요. 저는 그걸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 열여섯 살밖에 안 된 목동에게 힘을 주어서 거대한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었으니, 너희들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그런 능력을 준다고 믿으라고 가르쳤어요. 그건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거든요. 하지만 거기에는 다른 뜻이 더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걸 시원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혹시 선생님은 그런 데에 관한 다른 견해라도 있나요?”
“음! 그랬군요. 대답하기 전에 이름을 알고 싶네요.”
그렇게 해서 사라와 나는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됐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미스 김은 다윗과 골리앗을 본 적이 있나요?”
“네? 그건 몇 천 년 전의 일인데, 어떻게 볼 수 있나요?”
“본 것을 얘기해도 못 믿는 세상인데, 안 본 얘기를 믿는다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 ??? 그래도 성경에 기록 돼 있는 걸 어떻게 안 믿나요?”
“하하하. 누가 성경을 믿지 말라고 했나요? 다만 실제로 본 것과 그냥 기록을 통해서 믿는 것은 차이가 크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겁니다. 미스 김 눈에는 다윗과 골리앗이 안 보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보이거든요.”
“네?”
가뜩이나 큰 그녀의 눈은 더욱 커졌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겁니다. 따라서 성령의 감동을 입으면 에덴동산도 볼 수 있고, 다윗과 골리앗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요. 하하하 아마 내 말에 굉장히 큰 혼란이 올 겁니다. 하지만 지진과 같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 앞에 앉아 계신 분이 바로 다윗도 되고 골리앗도 되거든요.”
“아! 네에”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의구심으로 가득 찼다.
“자신이 본 것을 말하는 게 진실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항상 선과 악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선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이요, 악의 입장에서 보면 골리앗이 되게 마련입니다. 미스 김이 학생들에게 말한 것과 같은 가르침을 베푼다면 그 애들의 의식에는 ‘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죽여도 하나님이 축복과 은혜를 준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기독교가 타종교에 비해서 특히 더 배타적으로 흐르게 된 것도 그런 독선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식의 가르침이라면 과연 하나님이 찬동할까요? 내가 보는 다윗과 골리앗의 아야기는 이렇습니다. 다윗은 선의 입장이요, 골리앗은 악의 입장에선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선이 어떻게 악을 극복하는 가를 가리켜 주려고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갈 적에 지닌 무기는 창과 칼, 화살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양떼를 치던 막대기와 조약돌이었습니다. 막대기는 지팡이와 같은 것으로 예수를 달아 맨 장대(십자가)이며, 광야에서 모세가 세웠던 장대였습니다. 십자가는 사랑과 고난의 상징입니다. 조약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조약돌이 이루어지기까지 무수한 세월을 갈고 닦이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게 바로 악을 선으로 이기는 방편입니다. 무한한 인내와 연단! 그것만이 악을 진정으로 물리치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미스김이나 나나 다윗과 골리앗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눈앞에는 무수한 다윗이 있고, 골리앗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윗도 되고, 골리앗도 되는 법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돌에 대한 것만 간추려 놓아도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요. 예를 들면, 예수껫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적에 ‘이 돌들이 변하여 떡이 되게 하라’는 게 있지요? 그걸 그냥 사람들은 말하기를 ‘마귀는 먹는 것으로 사람을 시험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지요. 예수는 ‘너희들이 대답을 안 하면 이 돌들이 대답하리라’고 한 말씀도 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새긴 것도 돌판이었습니다. 이 돌들은 단단한 마음, 굳센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아이 이름에 석(石)이나 암(岩), 혹은 돌쇠니 바위니 하는 걸 많이 사용했지요.”
그녀는 그 후로 매일 찾아 와 성경을 공부하였다. 그렇게 해서 둘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리고 어느 덧 28년 차로 접어들었다. 아! 지금 나는 얼마나 아름다운 조약돌을 지니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있는 건지! 바람이 뺨을 매만지고 도망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