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의 기억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게 있었다.
日出寅卯辰巳不知는 선천 낙서의 정월이 뜨던 寅으로 후천에는 己未 태세가 들어오는데, 그 자리가 바뀌므로 선천의 양을 주름잡은 ‘인묘진사’는 알 수가 없고, 子와 亥는 본래 오행 상 같은 水에 속해 있었으며, 子는 12지지의 시작이요, 亥는 끝이 되어 서로 갈라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 후천에는 巳가 時頭가 되므로 이제는 서로 갈라지지 않는다는 식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운곡선생이 질문하는 걸 보면 다른 의미가 또 있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정도와 같은 기억을 하고 있었는지, 이구동성으로 같은 대답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들어가면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나요?
선천 낙서의 세수가 뜨던 寅자리에서 未태세가 뜨기 때문에 모른다고 할 요량이라면 굳이 ‘인묘진사‘라는 四個月을 왜 기록해야 했을까요?
그냥 ’寅卯不知‘라고만 해도 충분히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나요?
4개월을 기록한 이유는 인월, 묘월, 진월, 사월의 넉 달 자리로 신월, 유월, 술월, 해월이라는 넉 달이 들어간다는 걸 말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다음에 바로 ’日入酉亥子難分配‘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日入酉’ 즉, ‘태양이 酉로 들어간다’고 못을 박은 겁니다.
日入申’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기지사월이 아니라, 이지사월을 가리킨다는 걸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만약 기지사월을 두고 한 말씀이라면 申正月, 酉二月, 戌三月, 亥四月, 子五月이 되지요. 그렇게 되면 春末夏初라고 명기하신 수운대신사의 말씀도 헛 것이요, 진사지간성인출이라고 한 말씀도 다 헛일입니다.
亥3월, 子4월이 되어야 비로소 춘말하초가 되고, 진(3월)사(4월)이 되는 셈이지요.
이처럼 개벽주께서는 혹시 잘못 생각할까 봐, 이중삼중으로 철저하게 보호망을 쳐놓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亥와 子는 더 이상서로 분배되지 않습니다.
선천에서는 12지지의 시작이 子이고, 마지막은 亥가 되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후천에서는 巳頭龍尾가 되니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기와 이는 서로 한 몸인데 어찌 분배될 수 있나요?
즉 亥3월과 子4월은 孟平春信에 해당하는 지상선경의 봄소식입니다.
이상은 이지사월과 기지사월에 대한 설명이었는데, 다시 한 번 정리를 한다면 병세장 3절에서 대병과 소병의 원인은 無道에 있다고 하였으며,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有道로 방향전환을 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방향 전환은 유도가 되면 아무런 약물이 필요 없이 모든 병이 저절로 낫는다고 하였는데, 무도는 양이 음을 만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유도의 세상에서는 반드시 음과 양이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대병과 소병은 각기 午申戌子寅辰과 未巳卯丑亥酉가 자리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운대신사께서는 경신년(1860년) 음 4월 5일에 동학을 창도하셨는데, 그것은 후천의 역법으로 子4월이요, 理之四月에 맞추기 위한 도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60년 후인 서기 1920년 음 4월 5일에 이번에는 사수장께서 영부도법식을 갖춤으로써 후천 5만년의 대학을 개강했던 것입니다.
이 역시 이지사월에 맞추기 위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요.
지기금지원위대강은 후천의 팔괘를 가리키는 동시에, 지기금지 넉 자는 기지사월을 가리키고, 원위대강은 이지사월을 가리킨다는 사실도 유념하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지기금지원위대강에 대한 걸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