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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신

영부, 精山 2009. 12. 31. 07:34

개벽주께서 화천하신 후, 조철제가 꿈에 개벽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부산에서 태극도를 창시하였다.

개벽주의 종도들 중에서 차경석이 보천교를 만들어 점점 세력을 떨치고 있는 와중에 태극도와 마찰이 심했다.

서기 1921년 2월에 개벽주의 무덤을 파 헤치고 유골을 도적절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정통성에서 밀리고 있던 태극도에서 개벽주의 유골을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는 걸 정통성으로 삼으려고 벌인 일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문공신은 수하인 김정우(金定雨)를 시켜 조철제를 추종하게 하였다.

김정우는 통사동 이씨 재실에 개벽주의 유골이 숨겨진 걸 알아내어 문공신에게 일러주었다.

문공신은 김정우에게 힘센 장정을 딸려 보내 밤중에 유골을 찾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돌아와서 유골을 수습하여 보니 왼 편 완골(腕骨)이 없었다.

김정우 일행은 조철제가 대전에 간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길목을 지키다가 조철제를 붙잡았다.

그러나 조철제는 이미 김윤진에게 완골을 가지고 도망하게 하였으므로 헛일이었다.

조철제를 추궁해도 찾을 길이 없자, 김정우는 조철제가 지니고 있던 현금을 뺏고 풀어주었다.

조철제는 대전 경찰서에 김정우를 강도라고 고소하였다.

이 일로 인해 문공신이 배후에 있다는 게 알려지게 되어 문공신은 7년 간 징역을 살아야 했다.

그후 문공신은 서기 1941년 3월에 일본이 신사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다고 예언을 하였는데, 누군가 왜경에게 밀고를 하여 문공신, 심청송, 정판진 등 20여 명이 김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전주 검사국에 송치되어 또 다시 7년 형을 언도 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순천도에서는 문공신의 이와 같은 일을 가리켜 개벽주께서 문공신에게 문왕과 이윤의 도수를 붙인 결과라고 한다.

그것은 문왕(희창)이 주왕으로부터 유리에 7년 간 감옥살이를 한 것처럼 문공신도 7년 간 옥살이를 한 것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문왕이 구후가 주왕으로부터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문에 분개하여 의협심을 발휘하다가 유리에 갇힌 것처럼, 공신도 조철제의 파렴치한 짓에 분개하여 의협심을 발휘한 것이 같다고 본 것이다.

또한 이윤의 도수와 같다고 한 것은, 이윤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처사라고 비아냥을 받은 것처럼, 공신도 역시 처사와 같은 모습으로 항상 작대기를 끌면서 헤지고 때가 낀 옷과 찌그러진 갓을 쓰고 오장치를 짊어지고 교도들의 집을 심방하면서 포교를 했다고 한 것이 같다고 한다.

이 얘기는 순천도 선배들의 입에서 구전되어 온 것인데, 그 진위 여부를 떠나 기술해 보았다.

여하튼 문공신이 정음정양도수의 상징이기에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야 한다고 한 것이며, 그것은 현무경의 음양조화를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