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절
<하루는 개벽주께서 종도 10여인을 뜰 아래 늘여 세우신 뒤에 고수부와 더불어 마루에 앉으사 차경석을 명하여 망치를 들리고 개벽주와 수부를 치며 동상례(同床禮)를 받게 하시니 수부가 방으로 뛰어 들어가며 가로대 죽으면 한번 죽을 것이요 두 번 죽지는 못하리라 하시니 개벽주께서 크게 칭찬하시고 다시 안내성에게 망치를 들리사 경석을 치며 무엇을 하려느냐고 물으시니 경석이 역모를 하겠다고 대답하는지라 이에 수부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 나이는 스물 아홉이요 내 나이는 서른 여덟이라 내 나이에서 아홉 살을 감하면 내가 너 될 것이요 네 나이에 아홉 살을 더하면 네가 나 될지니 곧 내가 너 되고, 네가 나 되는 일이니라’하시니라>
해설
대순전경에는 同床禮로 기록을 했으나 東床禮로 바로 잡아야 한다. 동쪽 평상에서 배를 드러내 놓고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혼례(婚禮)가 끝난 뒤에 신부 집(新婦)에서 신랑(新郞)이 자기(自己) 벗들에게 음식(飮食)을 대접(待接)하는 일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원래는 결혼이 예정된 남자가 친지를 불러 축하연을 여는 일을 뜻했다. 지금의 피로연(披露宴)에 해당하는 풍습이라고 보면 된다.
《진서(晉書)열전 卷080왕희지(王羲之)전》,《세설신어(世說新語)아량(雅量)편》을 보면 왕희지(王羲之)는 자가 일소(逸少)인데, 왕광(王曠)의 아들이자 사도(司徒)인 왕도(王導)의 조카로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다. (王羲之,字逸少,司徒導之從子也。祖正,尚書郎。父曠,淮南太守) 당시 진류(陣留)지방에 명망가 완유(阮裕)가 살고 있었다. 왕도는 조카 왕희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애는 우리 집안의 뛰어난 인물로, 완유에 뒤지지 않을 것이오. (時陳留阮裕有重名,為敦主簿。敦嘗謂羲之曰:「汝是吾家佳子弟,當不減阮主簿)
어느 날 태위(太尉) 치감이 사람을 왕도에 보내 사윗감을 구했는데, 왕도가 동상(東床)으로 안내해 자제들을 살펴보게 했다. 여러모로 살피고 돌아간 사람이 태위에게 말했다.
“왕씨 집 자제들이 훌륭하긴 했지만 모두 사위가 되려고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이 동상에서 배를 드러내 놓고 태연히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時太尉郗鑒使門生求女婿於導,導令就東廂遍觀子弟。門生歸,謂鑒曰:「王氏諸少並佳,然聞信至,鹹自矜持。惟一人在東床坦腹食,獨若不聞。」鑒曰:「正此佳婿邪!」訪之,乃羲之也,遂以女妻之) 그가 바로 왕희지였고, 사윗감으로 선택되었다. 모든 형제들이 그의 결혼을 축하하며 큰 잔치를 베풀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항은 고수부가 굳이 동상례를 받지 않고 거절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고수부가 개벽주를 신랑으로 맞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고수부는 개벽주를 만날 당시에 과부였다. 한번 시집갔으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두 번이나 시집을 가겠느냐면서 도망을 간 것이다.
이는 곧 고수부와 개벽주는 동침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수부를 가리켜 증산의 두 번째 부인이라고 하며, 나중에 말순이까지 합하여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천의 천지를 개벽하러 온 개벽주가 무엇이 부족하여 부인을 셋이나 둔단 말인가?
만약 그럴 요량이었다면 왜 굳이 한 번 시집가 실패한 과부를 택했을까?
그런 면에서 대순전경에 고수부를 가리켜 ‘부인’이라고 한 표현은 반드시 ‘수부’로 바로 잡아야 한다.
차경석이 역모를 하겠다고 한 것은, 그가 포정도수를 맡았기 때문이다.
낡은 세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후천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역모를 할 수밖에 없다. 車京石은 月谷이니, 이는 낙서의 3양지간 陽谷이었던 곳을 음곡인 월곡으로 뒤바꾼다는 의미다.
6건천에서 천붕우출(天崩宇出)하여 5로봉전으로 역모를 하여 6중궁, 7손풍으로 거꾸로 뒤집어 지게 하는 이름이므로 역모라고 하였다. 이를 더욱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이 수부 29세와 개벽주 38세다.
낙서의 29착종을 용담의 38중도로 이어주는 것은 용담 9궁이라는 말씀이다.
낙서의 45도수에서 9를 더하면 용담 54도수요, 용담 54도수에서 9를 제하면 낙서 45도수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