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몇 번인가 정도는 포덕문을 읽은 적이 있었지만, 영부도법을 전수 받은 후에 읽어보니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구구절절 수운선생의 심정이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았다.
짤막하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체도 좋았다.
사시가 돌아가면서 운행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당연히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을 수운선생은 애석하게 여기고 있음이 또렷했다.
그것은 마치 집안에서 부모님의 헌신과 정성으로 아쉬움 없이 자라나는 자녀들이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지는 않고, 부모니까 당연히 그런 것으로 여기며, 자신들이 잘 나서 그런 줄로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게 아닌가?
부모를 일찍 여읜 정도는 누구보다 부모라는 존재가 절실했으므로 포덕문의 한 구절, 한 구절이 그대로 폐부를 찔렀다. 사람은 천지부모의 은혜를 모르면 안 되는 법이건만, 수운 시대의 사람들은 그런 건 생각도 안 하고 먹고 사는 일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음 분명했다.
하기야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정도는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면서 포덕문을 음미하였다.
수운 선생이 동학을 창도한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하늘(한울, 천주)의 존재를 드러내고, 은덕을 기리기 위한 것임은 방금 전에 언급한 바와 같다.
수운선생은 사시가 돌고, 만물이 생장소장을 거듭하는 모든 현상은 곧 한울님의 조화의 발자취라고 믿었다.
그것은 곧 자연만물은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말과 동일한 게 아니었을까?
그런 면으로 본다면 자연을 창조주의 작품이요, 피조물이라고 한 성경과 다를 게 없어보였다. 그러나 수운선생은 서학에서 말하는 천주를 믿지 않았다.
그것은 천주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남의 나라를 침공하여 빼앗고, 성당을 세우면서 ‘하느님을 잘 믿은 대가’라는 식으로 가르친다는 게 수운선생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믿음이라면 어찌 강제로 남의 나라를 침공하고, 심지어 성전(聖戰)이라는 명분으로 고귀한 생명을 살육(殺戮)한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그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들이 믿는 신의 능력이 대단한 게 아닐까?
수운 선생도 한 때는 천주교에; 대해서 ‘진짜냐, 가짜냐?’하는 의구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사람도 누가 뭐라고 하건 능력이 센 사람 앞에서는 아무리 착하고 귀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하릴 없이 작아지지 않는가?
신명들의 세계에서도 그 법칙은 통하는 게 아닐까?
그러기에 ‘너를 세상에 내어(生汝世間) 사람에 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敎人此法 勿疑勿疑).’고 했을 적에 대뜸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라고 했던 것이다.
그만큼 당시의 서학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늘이 내린 천명은 서학이 아니라, 동학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동학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