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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학문 4

영부, 精山 2010. 7. 2. 07:25

묻기를「도를 배반하고 돌아가는 자는 어째서입니까(曰反道而歸者何也).」

대답하기를 「이런 사람은 족히 거론하지 않느니라(曰斯人者不足擧論也).」

묻기를「어찌하여 거론하지 않습니까(曰胡不擧論也).」

대답하기를「공경 하되 멀리할 것이니라(曰敬而遠之).」

묻기를「입도할 때 마음은 무슨 마음이었으며 도를 배반할 때의 마음은 무슨 마음입니까(曰前何心而後何心也).」

대답하기를 「바람 앞의 풀과 같은 것이니라.(曰草上之風也)」

묻기를「그렇다면 어찌 강령이 됩니까(曰然則 何以降靈也)」

대답하기를「한울님은 선악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니라( 曰不擇善惡也).」

묻기를「해도 없고 덕도 없습니까(曰無害無德耶).」

대답하기를「요순의 세상에는 백성이 다 요순같이 되었고(曰堯舜之世 民皆 爲堯舜)

이 세상 운수는 세상과 같이 돌아가는지라(斯世之運 與世同歸)

해가 되고 덕이 되는 것은 한울님께 있는 것이요 나에게 있지 아니하니라(有害有德 在於天主 不在於我也).

낱낱이 마음속에 헤아려 본즉(一一究心則)

해가 그 몸에 미칠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害及其身 未詳知之)

이런 사람이 복을 누리리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듣게 해서는 안되니(然而斯人享福 不可使聞於他人)

그대가 물을 바도 아니요 내가 관여할 바도 아니니라(非君之所問也 非我之所關也).」

아! 참으로 감탄할 일이로다(嗚呼噫噫).

그대들의 도를 물음이 어찌 이같이 밝고 밝은가(諸君之問道 何若是明明也).

비록 나의 졸렬한 글이 정밀한 뜻과 바른 종지에 미치지 못했을지라도(雖我拙文 未及於精義正宗),

그 사람을 바르게 하고 그 몸을 닦고 그 재주를 기르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어찌 두 갈래 길이 있겠는가(然而矯其人 修其身 養其才 正其心 豈可有岐貳之端乎).

무릇 천지의 무궁한 수와 도의 무극한 이치가 다 이 글에 실려 있으니(凡天地無窮之數 道之無極之理 皆載此書),

오직 그대들은 공경히 이 글을 받으라(惟我諸君 敬受此書)

성스러운 덕을 돕기를 내게 비하면(以助聖德 於我比之則)

황연히 단 것이 화청을 받고 흰 것이 채색을 받는 것 같으리니(怳若 甘受和白受采)

내 지금 도를 즐거워하여 흠모하고 감탄함을 이기지 못하므로(吾今樂道 不勝欽歎故)

논하여 말하고 효유하여 보이니(論而言之 諭而 示之)

밝게 살피어 현기를 잃지 말지어다(明而察之 不失玄機). - 끝 ->

 

정도가 논학문을 자세하게 살펴보니 수운 선생의 사상이 손에 잡힐 듯이 와 닿았다.

포덕문에서 감지할 수 없었던 미세한 부분까지 알 수 있었다.

눈학문에서는 천도에 관한 개념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었으니 모든 것은 음양오행의 산물인데, 그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인간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나온 후에 3재가 정해지고 5행이 나왔다고 하였다.

이것을 옛 사람들은 천주님의 발자취라고도 하며, 무위이화라고도 하였으나 그 실상을 본 사람은 없는데, 그 이유는 ‘於古及今 其中未必者也’라고 하였으니, 즉 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그 이치를 잘 살피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9궁, 8괘, 사상, 삼재, 음양과 오행 등에 관한 이치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선천 종교 중에서 어느 종교가 이런 이치에 달통했을까?

여기서 정도는 동학과 서학의 차이를 분명히 규명할 수 있었으니 서학에서는 막연하게 믿음을 강조했으나, 동학에서는 확실한 천리를 학문으로 정립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동학은 천리, 즉 도수를 알지 못하면 서학처럼 수박 겉만 핥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