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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유사

영부, 精山 2010. 9. 6. 06:33

용담유사 (龍潭遺詞)

 

동경대전이 순 한문으로 지었다면, 용담유사는 순 한글로 지었다.

전자는 식자층을 기준으로 하였고, 후차는 아녀자를 비롯한 일반인을 기준으로 했다는 점에서 수운선생의 자상한 성품을 였볼 수 있다.

용담유사를 해설하기 전에 수운선생의 일대(一代)를 간략하게나마 훑어보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용담유사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배경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백과사전에 기재된 수운선생의 기록이다.

 

최제우 (崔濟愚, 1824~1864)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 ·수운재(水雲齋)이다.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는데 수많은 책을 읽어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10세 때에는 이미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탄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집안의 형편이 매우 어려워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면서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익히고,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복술(卜術) 등의 잡술(雜術)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라 여기고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1855년(철종 6년) 3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승려로부터 〈을묘천서(乙卯天書)〉를 얻고 난 후 더욱 수련에 힘써 1856년 양산군(梁山郡) 천성산(千聖山)의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 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가 죽어 47일 만에 기도를 중단했으며 다음해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 기도를 드렸다. 이후에도 울산 집에서 계속 공덕을 닦았으며, 1859년 고향인 경주로 돌아온 뒤에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을 계속했다. 이 무렵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고쳤다. 1860년 4월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공중으로부터 천지가 진동하는 듯 한 소리가 들리는 종교체험을 했다. 이후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사람들에게 포교할 준비를 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고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서학(西學: 천주교)을 신봉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어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피신하였다. 피신중에 자신의 도가 서학으로 지목되는 것을 반성하고 표현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으며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고 노력해 <논학문(論學文)>을 써서 서학을 비판하고, <안심가(安心歌)>·<교훈가(敎訓歌)>·<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었다. 1862년 9월 이술(異術)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혐의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와 최제우의 가르침이 민속(民俗)을 해치지 않는다고 증언하면서 석방해줄 것을 청원하여 경주진영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무죄로 석방했다. 신도가 늘어나자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신도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해 7월 최시형(崔時亨)을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그해 제자 23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어 대구감영으로 이송, 심문받다가 3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효수형(梟首刑)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