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정변의 역사 (1)
왕건과 개성왕씨
개성왕씨(開城王氏)는 후삼국의 난세를 평정하고 통일왕조 고려를 연 태조 왕건의 후예다. 이성계의 쿠데타로 고려가 무너지면서 멸족의 비운을 맞은 성씨다. 당시 왕씨들은 살아 남기위해 성을 바꾸고 변방에 몸을 숨겼다. 개성왕씨는 5백년 영화를 누린 왕족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국에 2만 명도 채 안 되는 희성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2000년 현재 개성왕씨는 1만9천여 명이다. 반면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의 전주이씨는 260만 명이 넘는다. 같은 왕족이었지만 전주이씨가 개성왕씨에 비해 무려 130배 가량이 많다.
그러나 영웅의 후예, 왕족의 긍지는 5백년 수난의 세월에도 가시지 않고 있다. 잔인한 보복의 세월을 건너 이제 가문의 부흥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역사상 <임금으로서의 마지막 영웅>이라고 할 태조 왕건은 신라 말 송악(개성)에서 왕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송악의 호족이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영걸의 자질을 지녔다. 스무 살에 태봉 국왕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역전의 무공을 세우고 중신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난세 평정의 새 주인으로 믿었던 궁예가 나날이 횡포해져 폭군으로 변하자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 유금필 등 동료 중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대고구려의 부흥을 내걸고 국호를 고려로 정하며 18년만인 서기 935년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한다. 그 다음해에는 후백제를 무력으로 굴복시켜 통일을 이룩했다.
고려 말 명나라가 철진 이북 옛 땅을 내놓으라고 억지 요구를 했다. 그러자 최영 장군이 우왕을 설득, 8만 대군을 일으켜 명나라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는 무너지고 만다.
왕업이 무너지면서 왕족 왕씨들은 멸족의 참변을 맞는다. 1392년 고려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조를 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바로 다음날 전국의 왕씨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체포된 왕씨들은 거제도와 강화도에 집단 수용됐다. 그 뒤 2년도 채 되기 전인 1394년 4월15일 이성계는 이들을 전부 수장시켜 죽여버린다. 상상을 불허하는 잔인한 정치보복, 대량 학살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희생된 왕씨들은 어림잡아 10여만명에 이른다. 개성왕씨 세보(족보)에는 공양왕을 비롯 당시 강화도와 거제도 등에서 억울하게 숨져간 1백여 명의 선조 명단을 기록하여 역사의 비극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당시 관원의 눈을 용케 피한 소수의 왕씨들은 옥(玉), 금(琴), 마(馬), 전(全), 전(田), 김(金)씨 등으로 성을 바꾸고 숨어 살았다.
이태조가 죽은 후 태종은 왕씨에 대한 체포령을 철회했다. 태종이 이같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느 날 밤 태종의 꿈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나타났다. 그는 왕씨에 대한 살육을 멈추지 않으면 큰 재앙을 내리겠다고 호령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태종은 이 꿈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났을 때 기이한 일이 터졌다. 제주도에서 사육중인 병마 수백 마리가 이름 모를 병으로 죽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호남 일대까지 확산되어 이 지방 일대의 가축들이 시름시름 죽어갔다. 조정이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다.”
아무튼 태종은 아버지와는 달리 왕씨 탄압 정책을 완화했다. 숨어있는 왕씨들도 찾아내도록 했다. 이 때 나타난 인물이 현재 개성왕씨들이 중시조로 받드는 <왕미>다. 그는 외가성인 민(閔)씨로 행세해오다가 이 때 본성을 되찾았다. 이후부터 왕씨는 고개를 들고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 벼슬길에 오른 인물은 거의 없다. 벼슬은 시키지도 않았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굳이 벼슬한 인물을 든다면 인조 때 왕희걸(부제학) 등 불과 30여명이다. 한편 오늘날 개성왕씨는 태조의 15왕자 동양대군(효은태자)파가 전체의 90%를 훨씬 넘는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임 여희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아 있다.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네놋다’폐위된 상왕 노산군(단종)을 영월 땅에 호송하고 돌아오다 슬픔을 노래한 이 시조는 개성왕씨의 후손 왕방연의 작품이다.
개성왕씨는 태조의 15왕자 동양대군(효은태자)파가 전체의 90%를 훨씬 넘는다. 주요파는 ▲병마절도사공파 ▲세마공파 ▲강릉부사공파 ▲병사공파 ▲참판공파 ▲사복사정공파 ▲부위공파 ▲양양공파 ▲안경공파 ▲시중공파 ▲평양공파 등이다.
경기도 이천시 율면 오성리,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경기도 개풍군, 경남 의령군 의령읍 상리가 집성촌이다. 조선시대에 35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으며 인구는 2000년 현재 19,808명이다.
( 정복규 익산신문 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