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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인간관 1

영부, 精山 2010. 12. 22. 07:52

동학의 인간관

 

어느 종교나 사상을 불문하고 인간을 만물의 가장 존귀한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천도교에서는 인간을 다만 존귀한 존재로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궁한 한울님’과 더불어 ‘무궁한 존재’로 보고 있음이 그 특징이 된다. 이와 같이 ‘유한적인 존재’인 인간을 신과 같은 ‘무한적 존재’, 곧 ‘무궁한 존재’로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시천주’, 곧 사람들 모두 그 내면에 매우 주체적으로 무궁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천도교의 인간관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한울님을 모신다’는 ‘시천주’, 나아가 ‘시’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하겠다.

 

대신사는 이 ‘시’라는 글자에 대하여 동경대전』에서 주문을 해석하는 대목에서, “시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내유신령), 밖으로는 기화가 있어서(외유기화), 온 세상의 사람이

각각 깨달아 옮기지 못할 것(각지불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의 상태란 다름 아니라, 안으로는 신령스러운 영이 있음을 느끼며, 밖으로는 어떠한 신비한 기운과 동화를 이루는 느낌을 갖게 되며, 이러한 자각의 상태를 깨달아 이 마음을 옮기지 않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면 이렇듯 대신사가 설명을 하고 있는, 안으로 느껴지는 ‘신령스러운 영’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는 다름 아니라 ‘나’의 주체이며 동시에 한울님의 마음이 된다. 그러면 밖으로 느껴지는 ‘신비한 기운과의 동화’란 무엇인가? 이는 곧 나의 기운이 한울님의 기운과 서로 일치함으로써 일어나는 작용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는 안팎으로 느껴지는 신령스러운 영인 신령의 작용이 되는 것이다. 즉 안으로는 신령이 자리하게 되고, 밖으로는 이 신령과의 동화작용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안과 밖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신령’은 ‘기화’를 통하여 활동을 하게 되고, 이러한 ‘기화’로 이룩되는 ‘신령’의 활동을 각기 깨달아 옮기지 않고,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대신사는 ‘각지불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천주의 ‘시’란 신령이라는 한울님 마음을 지니고, 기화라는 한울님의 실천적 삶을 각지불이를 통하여 옮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시천주란 곧 내 안에 자리한 한울님, 곧 나의 ‘참 주체’가 되는 영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한 치도 그 뜻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하며 살아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아울러 이러한 ‘시’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진아이며, 또한 우주의 본체인 한울님을 자신의 안에서 회복할 수 있으므로, 대신사는 이 ‘시천주’로 천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삼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시천주’의 상태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인합일의 경지이며, 인간이 이 우주에 화생할 때 한울님으로부터 품부 받은 바로 그 천심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런가 하면, 이는 곧 자신의 삶 속에서 ‘한울님 마음’을 한 치도 어김없이 실천하는, 그러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시천주’는 곧 인간이 태어날 때의 가장 순수한 마음, 즉 인간 마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된다. 즉 시천주란 곧 무궁한 존재인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시고, 그 무궁한 한울님의 삶을 나의 삶 속에서 실천하므로, 궁극적으로 ‘나’ 역시 무한한 우주와 더불어 ‘무궁한 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천도교의 인간관은 바로 이러함을 통하여 ‘무궁한 나’를 깨달아 가는 데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