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相)과 상(象), 상(狀)
얼굴의 이목구비를 통하여 인간은 모든 정보를 수집한다. 정보는 형상과 음색을 통하여 인지하게 마련이다. 앞에서 개략적이나마 색에 대한 걸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만물의 형상에 대한 걸 살펴보기로 하자. 형상이란 용어에는 ‘形象, 形相, 形狀’의 세 가지가 있다. 셋 다 ‘모양 상, 형상 상’이다. 이에 대한 차이를 먼저 구별하고 다음에 구체적인 사물의 모습을 언급하기로 하자.
‘觀相(관상)을 보다‘가 맞을까? 아니면 ’觀象(관상)을 보다’가 맞을까? 답은 둘 다 틀렸다. 왜냐하면 觀이란 말에 이미 ‘보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관상이라고 하면 이미 ‘상을 보다’고 한 셈인데, ‘관상을 보다’고 하면 ‘상을 본 걸 보다’는 중복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서울驛 前’이라고 하면 그만인 것을, ‘서울역 전 앞’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觀相‘과 ’觀象‘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手相‘이 맞을까? 아니면 ‘手象’이 맞을까? 相은 전생에 쌓은 공덕이 신체적인 특징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오랜 세월을 통하여 쌓아 놓은 業(업)은 얼굴을 변화시키는데, 그것을 살피는 것을 가리켜 ‘觀相’이라고 한다. 손금도 마찬가지여서 마음과 몸의 상태에 따라 변하는 것을 가리켜 ’手相‘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手相을 본다고 하는 것은 손금의 변형을 살피는 일이요, 手象은 선천적으로 만들어진 손의 모양을 가리키며, 手像은 사람이 조각이나 그림으로 나타낸 손의 모양을 가리킨다. 정동진에 세워 놓은 커다란 손은 手像이라고 해야 한다.
’觀象‘은 ’觀象臺(관상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천지의 기상을 관측하는 일을 의미하며, ’觀相‘은 사람의 얼굴을 살피는 일을 가리킨다. 얼굴은 왜 살필까? 그것은 얼굴은 항상 변하기 때문인데, 그런 변화는 반드시 내면에서부터 일어난다. 따라서 觀相을 하는 것은, 보이는 形像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무형의 변화를 읽기 위함이다.
相은 木과 目을 합한 글자다. 木은 오래전부터 동양에서는 태양이 솟는 동방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태양은 밤 새 어두움에 싸인 만물의 형상을 밝게 드러낸다. 木을 가리키는 숫자는 3과 8이다. 3木은 木氣를 가리키는데 5土의 기운을 얻어 비로소 木形으로 그 모습을 나타낸다. 그것이 바로 8木이다.
이처럼 木에는 3, 8의 의미가 들어 있으니, 그냥 ’나무‘라고만 하면 木의 眞味(진미)를 모른다. 우리가 역학과 한자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데에 있다. 木은 天(丨)과 地(一)와 人이 한데 합한 문자다. 人은 왼 편의 남자(丿)와 오른편의 여자(乀)가 한데 합한 모양인데, 하늘과 땅은 각기 한 개씩 존재하지만 인간은 남녀가 있다는 걸 木으로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木에는 ‘천지인‘ 3수가 함께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十은 無極(무극)이라고 하여 十色氣를 만들어내는 근원이다. 색이 그 모습을 보이는 곳은 동방이며, 계절로는 봄인데, 오행으로 木이라고 한 것은 이와 같은 이치 때문이다. 즉 十이 자신의 모습을 좌우로 보이는 상태를 木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또한 木은 十八이 합한 문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 18은 9 × 2이다. 9는 천지인이 각기 3변을 하여 3 × 3한 상태이니, 삼신의 변화를 가리키는 숫자다. 그러므로 9는 ’9변‘ 혹은 ’9궁‘이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木에는 十이 3과 8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의미가 다 들어 있으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目은 二라는 음양을 보게 하는 그릇이므로 ’눈‘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相은 무극이 음양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면 相은 세월과 상황에 따라 항상 변하는 모양을 가리킨다는 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