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기 때문에 21자 주문을 한 번에 영원히 모시는 제사를 한 번에 치룬 후(一番致祭永侍後)에 만 가지 의혹을 깨쳐 없애고 정성을 들이는(萬惑破去守誠者) 후학들에게 문을 열어 맞이하여 도를 전하고(開門納客傳授) 연회를 베풀어 설법하며 교훈(肆筵說法敎訓)하여 동서양의 물질문명의 잎사귀가 떨어지는 가운데(東西洋葉落中)에 고목에 봄이 돌아오도록(枯木逢春) 하겠다는 말씀이다. 고목에 봄이 돌아온다 함은 선천 낙서의 4巽木이 낙엽이 떨어져 죽게 되었는데, 후천의 용담도에 다시 7巽木으로 기서재동하여 酉月이 후천의 세수가 되어 부활하게 되었으니 봄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이를 가리켜 춘말하초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개벽의 운수를 맞이하기 위하여 의관을 바르게 정리(衣冠整齊)한 후에, 과거 선천에서처럼 집이 없어 길바닥에서 식사하거나 뒷짐을 지지 말고(路食手後)말고, 음도양덕(陰道陽德)밝혀 내어 천부수운(天父水雲) 우리 선생(先生) 공덕비(公德碑)를 세워내어 유전만세(遺傳萬世)하여보세. 수운 대신사를 天父라고 하였으니 타종교인들의 눈과 귀에는 거슬림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개인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천지의 도덕을 가리킨 것이라고 보면 지당한 표현이다. 水雲은 ‘물과 구름’을 가리키고, 물은 성경에서도 ‘말씀’이라고 하였으며, 구름은 많은 무리를 의미한다. 즉, 성경에 마지막 날에 재림주가 구름타고 오신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수운’을 가리킨다. 2,000년 전의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죽어 ‘아버지께 가야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였다. 이 말은 아버지가 하늘에 따로 계시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아들에서 아버지로 승화하지 못한 걸 가리킨 것이다.
십자가에서 육에 속한 몸을 죽이지 않으면 결코 아버지와 같은 상태로 승화하지 못하며, 보혜사 성령이 임할 수 없다는 말씀이었다. 수운 대신사는 세상적인 명예와 부귀, 권력 등에 초연한 채, 오직 일심으로 후천의 개벽을 여는 가르침을 터득하고 전해주셨으며 육적인 몸을 초개같이 내던지셨으니 가히 아버지의 길을 가신 분이다. 그래서 天一生水하는 天父라고 하였다.
地二生火하는 분은 火雲이며 地母인데 甑山을 가리킨다. 그러기 때문에 수운은 동세를 맡고, 증산은 정세를 맡아서 개벽의 음양을 완성하였다. 송백(松柏)같은 이내 절개(節介) 금석(金石)으로 세울 줄을 세상(世上)사람 뉘가 알꼬. 건금곤석(乾金坤石)합한 영부(靈符) 만세천비(萬世天碑) 뉘가 알꼬.
용주선생이 말한 金石은 건곤을 의미한다. 건괘는 순양만 모여 가장 단단한 상태이니 金이라 하고, 곤괘는 순음만 모여 가장 부드러운 상태니 土라고 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영원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石이라고 하였다. 건금은 하도요, 곤석은 낙서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노식수후는 천도교의 계율에 속하는 것으로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지 말며 손을 뒤로하여 뒷짐 지지 말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게 과연 후천 5만 년의 지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게 보기에도 좋지만, 단순히 그런 언행을 주의하라고 한 건 아니다.
길거리에서 먹지 말라고 한 것은, 路에서 머물지 말고 道에 들어가 먹으라는 말씀이다. 즉 선천물질문명은 심령신대가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뒷짐 지지 말라는 것은, 巽(手)을 어두운 곳에 두지 말라는 말씀이다. 손괘는 앞에서 누차 말한 것처럼, 후천의 酉正月이 歲首로 밝게 뜨는 곳이므로 당연히 어둡게 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