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 서삼릉 야외 현장 학습기)
오늘은 야외현장학습이 있는 날이다. 학창시절에 수학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삼삼오오 발산역 8번 출구에 늘어선 버스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가벼워 보였다. 날씨도 전형적인 가을 날씨답게 맑은 하늘과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기온으로 우리의 학습을 도와주었다. 넉 대의 버스에 각 조 별로 탑승을 하였는데, 내가 속한 3조가 제일 적게 참가하였는지 자리가 많이 남았다. 덕분에 자리를 찾지 못한 카페지기와 강광희 수석운영위원, 1기 이근호 회장들과 함께 갈 수 있었다. 말로는 많이 들었으나 막상 처음 가보는 ‘서오릉, 서삼릉’이다. 이미 강광희 수석운영위원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인터넷에서 미리 서오릉과 서삼릉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실물로 보는 학습은 상세한 강사의 설명을 들으니 생동감을 맛볼 수 있었다.
1조, 2조, 3조는 김정신 강사의 지도를 받고 나머지 조는 조경철 교수를 따라 따로 행동을 취했다. 서오릉은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다섯 개의 능을 일컫는다. 강사는 '왕이 계시는 경복궁을 기준으로 하여 서방에 있기 때문에 서능이라 하고, 다섯 개의 능이 있어서 서오릉이다'고 하였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왕이 정사를 볼 적에 남향을 하나요? 아니면 북향을 하나요?' '남향입니다' 일행은 우렁차게 대답을 한다. 그 정도의 질문이라면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그럼 국립박물관에 가면 구석기, 신석기 시대에 청동거울이 있는데, 왜 그런 것들을 왕이 소지하고 있었나요?' 식은 죽이 갑자기 뜨거워졌는지 답들이 없다. '왕이 남향을 한 것은 북을 등지고 앉으니 앞에 있는 신하들이 볼 적에는 임금의 얼굴이 밝게 빛나 보입니다. 거기에 휘황찬란한 옷을 입으니 더욱 빛이 나겠죠? 비록 지금의 거울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당시에 청동거울이나 청동 칼을 소지하고 있으면 번쩍번쩍 빛이 났지요. 그것은 신하나 백성들에게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는 좋은 수단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백성들은 아 과연 하늘이 내린 분이구나! '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복종하게 마련이었죠.'
서오릉 중에서 제일 먼저 명릉(明陵)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명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홍살문이 버티고 있었으며 그 앞 쪽으로 자그마한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자, 이 물은 왜 흐를까요? 여러분은 어느 능이건 반드시 앞 쪽에는 냇물이 흐르고 이처럼 홍살문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신지 모르겠는데, 냇물이 흐르게 한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고 망자를 만나라는 무언의 가르침이고, 붉은 홍살문도 역시 축귀(잡귀를 쫓음)의 상징입니다.' 그러면서 동지에 팥죽을 먹는 것과 같이 붉은 색은 밝음을 상징하여 어두운 잡귀를 쫓기 위한 의식에 사용한다고 덧붙였다. '홍살문은 대개 이와 같은 능에도 있지만, 열녀와 효자, 충신열사 들을 기리기 위한 방편으로 세웠지요.' '이런 홍살문은 유교의 상징물인데, 사찰에도 홍살문이 있는 곳이 수원과 화성에 있는 용주사입니다. 거기에는 융릉과 건릉이 있는데, 그 능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모신 곳이지요. 절에서도 효를 강조하기 위한다는 유교의 습속을 따라 홍살문을 세웠지요. 왕릉 앞에 흐르는 냇물을 가리켜 禁川이라고 하는데 세속적인 것들을 금하여 깨끗하게 씻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명릉 앞에는 사당이 있었고, 사당으로 통하는 곳에는 바윗돌들이 3차선으로 50 미터 정도 길게 깔려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돌을 가리켜 박석(薄石)이라고 하며 그 길의 이름을 참도(參道)라고 한다. 참도는 셋이 하나 되는 길이라는 의미다. 그러기 때문에 參을 ‘석 삼’이라고도 부른다. ‘강사는 '여러분이 걷고 싶은 대로 3차선 중에 어떤 곳이건 걸어보세요' 하였다. 나는 얼른 중앙에 있는 제일 높이 돋은 길 위로 올라섰다. 옆에 낮은 길로 걷는 분들이 더 많았다. '지금 제일 높은 곳의 길은 神道라고 하여 돌아가신 망자가 걷는 길입니다.'는 강사의 말에 나는 얼른 밑으로 내려섰다. 아무리 왕이라고 하여도 사당으로 갈 적에는 낮은 길로 가는 것이 예의라고 하였다. 신도 오른 편의 낮은 길로 임금이 간다고 하여 어도(御道)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일러주었다. 묘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게 아니라 신주를 모신 사당에서 제사를 드린 후에 능에서 참배를 하는 게 관례라고 하면서 임금의 묘는 '무덤'이나 '원'이 아니라 '능'으로 부른다고 하였다. 능을 관리하는 직책을 가리켜 능참봉이라고 하는데, 대개의 경우 백그라운드가 약하거나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 밀려난 한직(閑職)에 속한다고 하였다. 본래는 과거에 급제한 18등급 중에서 11번째나 12번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직책인데, 일종의 성균관 유생들의 인턴과정으로 보면 이해하기 쉬울b거라고 하였다.
명릉으로 올라가는 한켠에는 댓돌들이 방형으로 널부러져 있었는데, 그 곳은 본래 능을 관리하고 음식을 만들던 곳으로 지금은 허물어지고 주춧돌만 남은 것이라고 하였다. '혹시 중국에 가서 자금성을 보신 분이 있을 텐데, 그 규모와 이 명릉의 규모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크다고 하여 좋은 건 아니지요. 중국의 광활한 대륙과 우리의 협소한 땅을 비교해보면 모두가 자신의 여건과 환경에 맞게 지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금성과 같은 거대한 규모로 능을 조성하였다면 아마 재정파탄이 나고도 남을 일이지요. 그리고 천자국과 제후국은 각기 지켜야할 규칙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었지요. 저 사당은 옆으로 보면 세 칸이요, 앞에서 보면 두 칸인 '三二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록 크지는 않지만 저 지붕 위에 달린 짐승들의 개수를 세어보면 제법 격이 높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당의 날아갈듯 한 지붕의 곡선 위에는 동물들이 네 개씩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경복궁 근정전은 그런 짐승이 10개씩이 넘게 붙어 있다고 한다.
사당으로 가는 옆에는 비각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비문이 아름답게 새겨진 비석이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글씨체는 지금의 글씨체와 많이 달랐는데, 매우 아름답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두 개의 비석은 숙종과 인현왕후를 함께 모신 비석과 인원왕후만 홀로 모신 비석이라고 하였다. 천자가 돌아가시면 붕어(崩御)라 하고, 임금이 돌아가시면 승하(昇遐), 혹은 훙(薨)이라 하며, 일반인의 죽음은 '졸(卒)'이라 한다.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붕어하신 분은 고종과 순종 두 분 뿐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분들은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를 새로 만든 천자이기 때문이다. 붕어라는 말은 ‘무너질 붕’을 쓰는데, 천자의 죽음은 '산천이 무너지는 슬픔'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중국 심양에 있는 천자의 능은 걷다가 지칠 정도로 규모가 큰데, 우리가 건축술이 없어서 그런 걸 못 지은 게 아니라 당시의 국제적인 관계가 그랬다. 그것을 모르고 ‘에이 우리는 국력이 약해서 그런 거야’라고 비하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전에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던 것을 덮어놓고 사대주의(事大主義)라고 몰아 부칠 것이냐? 아니면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한 방편이냐 하는 것은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문제라고도 하였다.
명릉 주위에는 곡장(曲墻)이 있었는데, 중국에는 붉은 벽돌로 담을 쌓는 게 보통이지만, 우리는 화강암이 많기 때문에 화강암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인원왕후의 능은 혼자서 덩그러나 놓여 있었다. 일행 중에 누군가가 '왜 인원왕후 능이 숙종과 인현왕후보다 더 높은 곳에 지었느냐?'는 질문을 하였다. '그건 풍수지리학적인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꼭 신분이 높다고 해서 높은 곳에 묘를 만드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사임당과 그 아들인 율곡선생의 묘를 보면 율곡선생의 묘가 더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걸 역장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칼을 들고 서 있는 무인석과 홀을 들고 서 있는 문인석 등이 능 옆에 벌여 서서 능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빙 돌아 서삼릉으로 갔다. 서삼릉 옆에는 '종마장(種馬場)'이 있어선지 비릿한 말 오줌 냄새가 풍겼다. '무식하기도 하지, 이런 곳에 종마장을 지어 경관을 해치다니!'하는 질책이 원우님들의 입에서 많이 나왔다. 서삼릉은 희릉, 효릉, 예릉이라는 세 개의 능이 모인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예릉은 그 유명한 '강화도령 이원범'이 철종이 되어 묻힌 곳이다. 본래 강화도령은 사도세자의 후손이었는데, 자신이 왕족인 줄도 모르고 나무나 하고 밭을 매면서 강화도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외척들의 싸움이 극성에 이르러 왕족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인데, 유능하고 똑똑한 군주를 세우면 자신들 맘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무능하고 허수아비 같은 왕들을 세우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그래도 똑똑한 임금이 영조와 정조였는데, 정조가 일찍 세상을 뜨자 다시 외척들의 전횡이 극에 달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헌종이 승하한 후, 6촌 범주에 속하는 왕족의 씨가 말랐다. 그래서 부랴부랴 찾아 낸 것이 강화도령이었다. 철종은 아들을 두지 못하고 딸만 둔 채 승하했다. 그런 외척의 권세가 정점에 달했을 때에 왕위에 오른 이가 강화도령 철종이었다고 한다. 겨우 13세에 왕위에 올라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내부적으로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었으며, 마침내 1862년에 진주민란이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흥선대원군이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키기 위한 간계를 꾸몄는데, 비록 미약하지만 우리 내부에서도 자생하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건만, 그것을 무지하게 짓밟은 것이 일본의 만행이었다. 예릉의 文人石은 명릉이나 다른 능의 그것과는 차이가 안 될 만큼 머리가 가분수로 컸다. 그것은 그만큼 철종 당시의 사회상이 불안했음을 입증하는 셈이라고 하였다. 통일신라의 조형물들이 초기와 중기에는 매우 아름답고 조화로웠으나, 후반기로 갈수록 이상한 형태로 변모한 것도 그 좋은 예라고 강사는 설명을 하였다.
희릉은 장경왕후의 능이고, 효릉은 조선 제12대 왕 인종(仁宗 1515~1545, 재위 1544~1545)과 인종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1514~1577)의 무덤이다. 효릉이란 이름은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인 1545년 7월 경복궁 청연루에서 숨을 거두는데, ‘부모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해 10월 15일 유언에 따라 부왕인 중종과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인 정릉(靖陵) 옆에 능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1562년(명종 17) 정릉이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宣陵) 옆으로 옮겨갔고,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禧陵)이라는 능호로 바뀌어 효릉 옆에 있데 되었다고 한다. 임진란을 일으킨 왜적들이 지금의 선릉에 묻혀 있던 중종의 시신을 파헤치는 바람에 현재의 시신이 제대로 된 주인공인 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효릉은 비교적 다른 능보다 규모가 작았는데, 그 이유는 인종이 자신의 장사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명한 데다 당시 인종의 외가인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가인 소윤(小尹)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명종과 문정왕후 측에서 상례절차를 줄이고 능역 조성을 소홀히 한 것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일화 들이 많을 듯한데, 미처 시간이 없어서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태실(胎室)을 돌아보았다. 본래 그 곳은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게 관례인데, 특별히 우리에게 공개를 한다고 하였다. 태실은 옛날 왕가(王家)에 출산이 있을 때 그 출생아의 태(胎)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을 가리키는데 태봉(胎封)이라고도 한다. 아이가 출산하면 태는 깨끗이 씻은 후 항아리(백자)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했다.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다음, 항아리를 큰항아리에 담았다. 이렇게 두 개의 항아리에 태를 보관하였다. 항아리에 보관된 태는 태봉지를 선정하여 묻는다. 이것은 안태(安胎)라고 한다. 태봉지가 정해지면 궁에서는 태봉출(胎奉出) 의식을 행하고, 안태사 행렬이 태봉지로 출발했다. 안태 행렬이 태봉지에 도착하면 그곳의 지방관들은 태를 봉안하는 의식이 끝날 때까지 지원하였다. 국왕 태실은 8명의 수호군사를 두어 관리하였으며 태실 주변은 금표로 접근을 제한하였다. 태봉(胎峰)·태산(胎山)·태봉지(胎封址) 등의 명칭이 있는 지명은 이곳에 태실이 있었다는 의미라고 한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던 항아리들을, 일본인들이 한 곳에 모아 잘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지금의 장소에 모아 두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명분으로 백자와 그 속에 들어 있는 온갖 부장품을 빼내기 위한 일본인들의 치졸한 속내가 있었다고 강사는 설명을 하였다. 태실에는 조선 왕조의 모든 임금들의 태실이 모셔져 있었는데, 자그만 비석을 세워 그것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지명과 일자를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모든 비문의 처음 글자 두어 자가 고의적으로 훼손된 것이 보이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건 일제의 연호인 소화(昭和)라고 기록을 했기 때문에 긁어낸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숙종의 태실 다음 칸에는 기조석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명쾌한 답이 없었다. 다만 ‘연산군의 태실 같다’고 하면서 ‘연산군은 비록 임금이었지만 폐위를 당했기 때문에 태실도 모시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비록 시간에 쫓겨 일정이 부족하였으나, 나름대로 현장에 나와 학습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 아닌가? 새삼스런 일은 아니지만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는 기회였다. 전형적인 가을 하늘 아래 역사적인 문물을 대하면서 다정한 원우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인터넷이나 역사 기록물을 통하여 공부하는 게 좋을 것이고, 이만 간략하게 그날의 감동을 담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