田
요즘 삼산노주님의 바둑에 관한 글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다. 바둑은 밭둑에서 유래했다는 심증이 더욱 굳어진다. ‘밭’은 ‘바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바탕은 모든 것이 기본이 아닌가? 田은 그 자체가 부수(部首)다. 部首는 ‘분류하는 머리’라는 말이다. 아무리 삼라만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그것을 찾는 단초만 제대로 간파하면 술술 풀리게 되어 있다. 田이라는 글자를 격암유록에서는 四口合體라고 하였다. 네 개의 口를 합쳐 놓은 글자라는 말인데, 그냥 단순하게 그 모양을 가리킨 건 아니다. 口라는 글자에는 네 개의 一이 있으니, 이는 곧 四象을 의미한다. 天地人物이라는 四物속에 들어 있는 고유한 개성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 바로 口다. 우리의 사물놀이는 바로 이런 개성을 노래하는 깨달음의 몸짓이다.
‘넷’을 ‘넉’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넋’과 불가분의 관계다. ‘얼’과 ‘넋’을 숫자로 말한다면 ‘3’과 ‘4’다. 그래서 ‘삼혼사백’이라는 용어도 생겼다. 3혼을 주관하는 곳은 간이요, 사백을 주관하는 곳은 폐다. 간은 동방의 기운을 다스리고, 폐는 서방의 기운을 다스린다. 四口合體는 사물의 넋을 한데 모아 놓았다는 의미다. 그러니 어찌 田을 모르고 지낼 수 있단 말인가? 격암유록에도 이르기를 ‘利在田田’이라고 하였다. ‘이로움은 밭과 밭에 있다’는 말이다.
口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만만치 않은 분량이 될 것이다. 그걸 다 언급할 수는 없고, 다만 그것을 ‘입‘이라고 한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느껴보자. 입은 음식물이 들어가는 ’入‘과 통한다고 하여 붙은 건 아닐까? 입은 얼굴의 이목구비 중에서 맨 밑에 붙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맨 밑에 있는 땅의 음식물이 들어간다. 반대로 눈은 맨 위에 붙어 있기에 하늘의 빛을 감지한다. 눈과 입은 옆(一)으로 벌어졌고 코와 귀는 상하(丨)로 벌어졌다. 옆으로 벌어진 것은, 조화와 균형을 의미한다. 보는 것과 먹는 것은 누가 뭐래도 차별이 없게 균형을 맞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리라. 이에 비해 귀와 코는 엄정한 기율을 세워야 한다는 말씀이다. 차별이 없는 평등도 좋지만, 엄정한 기율이 없다면 방종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또한 아무리 기율을 중시한다고 해도 조화와 균형감각을 잃는다면 삭막한 세상으로 변한다.
수평(一)과 수직(丨)을 합하면 영락없는 十字가 된다. 그리고 十을 담고 있는 口는 田이 된다. 이처럼 田에는 십이 들어 있다. 만약 十이 없다면 그건 밭이라고 할 수 없다. 그대의 마음에 十字가 없다면 그건 이미 생명력이 죽은 상태다. 十은 1, 2, 3, 4를 합한 셈이니, 이 역시 4상을 의미한다. 사상은 하늘에서는 일월성신이요, 땅에서는 수화토석이며, 인체에서는 이목구비요, 그 모양은 口이니 그것을 일러 ‘됫박’이라고 한다. 됫박은 쌀이나 보리를 재는 도량형기를 가리킨다. 쌀이나 보리를 재는 행위를 가리켜 ‘되다’라고 하니, 이는 곧 모든 일이 온전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즉, 힘들여 쌓은 공덕을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갈 만큼 적당히 계산하는 상태가 ‘되다’라는 의미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수행이 있다고 하여도 적당히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못하고, 넘치거나 모자라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되를 가리키는 한자는 승(升)이다. 升은 千과 十을 합한 글자다. 즉 十이 1000배로 되어야 비로소 ‘되다’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태양(日)처럼 빛을 발하여 하늘로 昇天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