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원리를 가르쳐주는 위대한 경전입니다. 결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어찌 보면 달관한 가르침 같으면서도 어찌 보면 메아리 없는 허공의 소리 같은 애매한 가르침이 아니라, 실사구시(實事求是)할 수 있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방편이 천부경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무엇이건 첫 단추를 잘 꿰어야합니다. 하물며 난해하기 짝이 없는 천부경일진대, 첫 단추가 잘 못 꿰어지면 그 나머지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온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서 천부경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一始한 一의 정체를 밝혀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가 시작했다고 하여 대부분 ‘하나’로 풀이를 하거나, 아니면 그냥 ‘一’로 풀이하였더군요. 물론 그렇게 한 것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요. 아니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하지만, 거기에도 생각할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그 一은 유형적인 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우주가 시작하였다느니, 만물이 시작하였다느니 하는 식의 풀이는 정곡(正鵠)을 찌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방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무형에서는 무형이 나오고, 유형에서는 유형이 나온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결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무언가를 만든 게 아니라, 무언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 무엇이 바로 ‘천지인 3극’이라고 천부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부경에서 말하는 천지인 3재, 혹은 3극은 유형이 아닌 무형적인 것입니다.
우주만물은 무형과 유형의 둘로 크게 구분합니다. 무형도 一이요, 유형도 一입니다. 그리고 이 둘을 합한 것도 一입니다. 이처럼 세 가지의 一 중에서 천부경 一始의 一은 무얼 가리킬까요? 유형과 무형으로만 구분한 상태를 가리켜 ‘음양’이라 하며, 이 둘이 합하여 새로운 하나를 탄생시키는 것을 가리켜 ‘3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움직이면 3신이요, 가만히 있으면 음양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천부경 一始의 一은 始, 즉 움직이는 주체를 가리킨 것이므로 셋이 하나 된 ‘三神一體’라고 봅니다. 신은 무형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一始의 一은 유형적인 물질이나 우주만물을 가리킨 것이라고 해선 안 됩니다. 유형과 무형, 그리고 이 둘을 합한 것까지 포함한 셋이 하나 된 상태! 그것을 말한 것이 바로 一始의 一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무형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부경은 유형적인 땅이 아니라, 무형적인 하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준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무형적인 하늘! 그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은 시공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시공이 있다 함은 곧, 시공에 갇혔음을 의미하는 것인 바, 一始한 一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항상 나타날 수 있고, 사라질 수도 있으며, 맛도 보고, 소리도 낼 수 있는 존재가 一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히 시공이라는 틀 속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무형적인 상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그런 것을 들자면 ‘하느님, 정신, 의식, 깨달음, 마음, 생각’ 등등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하늘을 가리키는 天이라는 글자를 살피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天에는 위의 하늘을 가리키는 一과 밑의 땅을 가리키는 一과 사람을 가리키는 人의 셋이 모인 글자인데, 이 모두는 무형적인 요소를 가리킬 뿐, 결코 유형적인 모습을 가리킨 건 아닙니다. 즉, 天은 천지인이라는 3재의 씨앗이 모였을 뿐, 형상은 드러나지 않는 곳임을 말해 줍니다. 형상은 땅에서 드러납니다. 형상이 드러난 상태를 부호로 표기한다면 十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무형을 부호로 표기한다면 一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天一一이나 地一二나 人一三은 모두 무형적인 것을 일러준다고 보아야 합니다. 天一一이나 地一二나 人一三에 대한 말씀은 지금 할 순서가 아니기에 다음으로 미루지만, 天符는 무형의 것이라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치를 통달하면 우리의 생각에도 3극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을 할 적에는 반드시 3극으로 분석을 해보기도 하고, 그걸 퍼줄 맞추듯이 합해 보는 과정을 통과할 적에 비로소 온전한 생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생활 속에서 습관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렵고 생소한 느낌이 들겠지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닙니다. 원리만 제대로 이해하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는 무엇보다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천부경의 첫 머리 一始는 ‘깨달음의 시작’을 가리킨다고 보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봅니다.
깨달음의 시작! 그것이 一始를 가리킨다면 그것이 시작하는 공간은 어디이며, 시간은 어느 때일까요? 물론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요. 생각이나 깨달음이라는 게 일정한 틀이 있는 건 아니지요. 그래서 천부경에는 ‘無櫃化三’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틀이 없다는 것만 강조한다면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궤라고만 한 것이 아니라 化三이라고 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化三이 되려면 일정한 법칙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일정한 법칙도 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건 나중에 다시 언급할 시간이 있을 것이고, 지금은 一에 대한 것에 집중하기로 합시다.
어떤 사물이건 반드시 內外가 있는 법입니다. 외형은 유형으로 나타나게 마련이요, 내면은 무형이기에 쉽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잘 보이는 사물의 겉만 보고 판단을 내리는 습관이 몸에 배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은 속의 내면에서 원인이 발생한 결과가 아닌가요?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고 판단을 내리는 사람과, 원인을 먼저 파악한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원인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면 그릇된 결과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겠지요? 어리석은 사람은 결과에 매달리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원인을 파악합니다. 우리는 지금 왜 천부경을 공부하려고 하나요? 바로 모든 것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천부경을 여러 가지 과학적인 면과 결부하거나, 현실과 결부하여 풀이하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원인을 밝히는 일입니다. 원인이 밝혀진다면 모든 질병은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천부경은 그 어떤 것보다 더 간명하게 그런 걸 터득(攄得)할 수 있는 우리민족의 보배라는 사실을 안다면 커다란 자부심과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시대에 해야 할 사명입니다.
그런 뜻에서 一에 대한 외형과 내면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一의 형태를 보면 느낌이 듭니까? 아마 무언가 크게 ‘가르다, 쪼개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실제로 옥편을 보면 一을 가리켜 ‘가를 일’이라고도 했습니다. 만약 一이 없다면 어떤 모양일까요? 그건 0이라고 해야겠지요. 0을 가리켜 無라고도 하고, 空이라고도 하며, 虛라고도 합니다. 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런 것도 살펴야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문자는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고도의 사색과 명상을 통해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0에는 無, 空, 虛라는 세 가지 면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곧 一도 세 가지 면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無라는 글자는 흔히 ‘없을 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육서(六書 : 한자의 여섯 가지 구성 방법. 곧 상형(象形), 지사(指事), 회의(會意), 해성(諧聲), 전주(轉注), 가차(假借)) 중에서 無는 어디에 해당한다고 보십니까? 집에 가서 잘 찾아보세요. 그냥 여기서 들은 것으로 끝내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직접 확인을 해 보는 게 좋습니다. 편안하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는 게 자연의 법칙입니다. 힘들여 옥편도 찾고 명상도 해보면서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옥편을 보면 無는 상형문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정확하게 소개를 한다면 ‘양손에 장식을 들고 춤추는 모양을 본뜬 글자’입니다. 춤을 추는 모양이 無라니? 하고 의아하게 여길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것은 無가 단순하게 ‘없다’는 것만 가리킨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장신구를 들고서 춤을 춘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장신구는 바로 四物입니다. 4물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면 4물은 사라지고 하나가 됩니다. 즉, 無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있으되 전체와 개체가 하나 되어 전체도 없고, 개체도 없게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보면 전체도 있고, 개체도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상태를 가리켜 無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空은 穴(구멍 혈)과 工(만들 공)이 합한 형성(形聲)문자글자입니다. 穴은 사물이 八로 벌어진 것을 커다란 宀(집 면)으로 덮어씌운 모습입니다. 空을 보통 ‘빌 공’이라고 하여 텅 빈 상태를 가리키는 걸로 알고 있지만, 실은 8괘로 벌어진 모든 씨앗을 품고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곧 언젠가는 8괘가 만들어져서 나오게 되는 곳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나요?
마지막으로 虛(빌 허)를 살펴볼까요? 虛는 虍(호피무늬 호)와 丘(언덕 구)가 합한 글자가 합한 형성문자입니다. 虍는 호피무늬라고 하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은 모양’을 가리킬 적에 주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虛는 ‘丘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라는 셈이 되겠군요. 丘는 部首를 一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곧 평평한 땅을 가리킵니다. 그 一위에 北을 올려놓은 것이 원래 丘자였으며, 그것을 언덕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언덕을 보통 邱(예 : 大邱)라고 쓰지만, 본래 큰 丘자가 원조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孔子께서 丘라는 이름을 쓰니까, 성인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말자고 하여 고을을 가리키는⻏(고을 읍)을 붙여서 邱라고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北쪽에 있는 땅을 ‘언덕’이라고 하게 됐을까요? 그것은 사람이 사는 집은 산 밑 밝은 남향받이에 있으므로 북쪽으로는 커다란 언덕이나 산이 막혀 있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기에 그랬던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의문이 드는 것은 왜 하필이면 호피무늬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인 虍속에 丘를 집어넣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호랑이가 선천의 세수(歲首)를 물고 나오는 정월(正月)의 주인공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1년 12개월이 구체적인 무늬로 드러나야 하는데, 그걸 가로 막고 있는 커다란 산이나 언덕이 있어서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빌 허’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즉, 虛는 시간이 빈 상태라는 말입니다.
다시 정리를 해볼까요? 虛는 시간이 빈 상태를 가리키고, 空은 상대적으로 공간이 빈 상태를 가리키며, 無는 이 두 개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虛空은 천지대자연이 빈 상태를 가리키며, 無는 허공이 된 인간의 의식상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부경에 ‘一始無始一’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一始虛始一’이나 ‘ ‘一始空始一’이라고 하는 표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즉, ‘一始無始一’에는 이미 ‘셋이 어울려 하나로 시작을 하니 개체의 하나는 없어지다’는 뜻이 있었던 셈이지요. 셋이 어울린다 함은 곧 비록 무형이지만 셋이 한데 춤을 추는 율려가 있었다는 말이고, 율려에서 빛과 소리가 동시에 나오면서 생명은 비로소 유형체로 화하게 됩니다.
이처럼 ‘없음’을 상징하는 0에는 천지인이라는 3극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0과 상대적인 一을 통해서 3극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걸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一은 ‘가르다, 쪼개다’는 느낌을 줍니다. 가르고 쪼개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과연 무엇일까요? 그건 一 이전의 상태인 0입니다. 一은 0을 가르고 쪼개는 상징입니다. 즉, 0과 一은 상대적인 관계입니다. 0과 一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0은 무언가 한데 모아놓은 느낌이 드는 반면, 一은 반대로 그걸 갈라내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또는 一은 무언가 새롭게 시작을 하는 느낌이라면, 0은 반대로 그 모든 걸 다 지워버리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0이 다하면 一이 나오고, 一이 다하면 0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0은 텅 빈 상태라고만 인식하면 곤란합니다. 0울 둥근 바둑알로 비유해 볼까요? 여기에 흑백의 바둑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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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0의 형태를 띠고 있지요? 그러나 흑돌은 무언가 충만한 느낌이고, 백돌은 텅 빈 느낌이 들지 않나요? 텅 빈 것은 모든 유형적인 걸 흩어버렸기에 ‘陽이라 하고, 반대로 그걸 충만하게 한 것은 陰이라고 합니다. 즉, 0에도 음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걸 다음과 같은 도식(圖式)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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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번에는 一을 위와 같은 도식으로 그려볼까요?
두 도식을 보면 결국 0과 一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말할 수 있습니다.
<0은 一의 무형이며, 一은 0의 유형이다> ----------------------- 天(복희도)
<0은 一이 靜한 것이요, 一은 0이 動한 것이다> ------------------ 地(문왕도)
<0은 一의 시종이 되며, 一은 0의 시종을 이룬다> ---------------- 人(용담도)
이처럼 0과 一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마치 손바닥과 손등의 양면(兩面)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0은 一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서 생긴 도형이라는 걸 상기(想起)하면 둘은 서로 한 몸이었다는 걸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