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주제는 ‘진리는 어떻게 터득하는 게 가장 효율적일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세 분의 답변이 있었군요. 답변에 감사를 드립니다. 코쿤님은 <헛된 욕심과 그 주체인 我에서 벗어나는 길>이라 하였고, bchess 님은 <바른 감각을 활용하는 일>이라고 하였으며, 천봉학님은 <숨을 멈추고 반응하는 자신의 내부를 최대한 깊이 바라보기>라고 하였습니다.
세 분의 답변이 서로 다른듯하지만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헛된 욕심은 헛된 방향으로 감각을 유도하기 때문이죠. 그런 망상을 벗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진실된 면을 보아야 하는데, 그 한 방편으로 지식(止息)이 등장한 것은 아주 오랜 관습이었습니다. 지식을 하게 되면 성(性)과 명(命)이 한 곳으로 일치하여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외에도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과 ‘명상이나 참선을 행하는 일’, ‘깨달음의 책을 읽는 일’, ‘여행을 떠나는 일’ 등, 여러 가지 방편이 진리를 터득하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것은 각자의 취향과 성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일관하는 게 있지 않을까요? 그건 아마도 ‘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생각(生覺)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깨달음을 낳다’는 뜻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언행의 방향도 결정되고, 그것은 그대로 생의 방향으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물론 아예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숨을 멈추거나 명상을 하는 게 더 좋다고 보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걸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 역시 결국은 한 생각을 얻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따라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는 게 진리를 터득하는 한 요령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팔정도(八正道)’를 하라고 가르치셨지요. 8정도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요령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냥 무조건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한다고 해서 효율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죠. 내가 강좌 중에 많이 하는 얘기 중에 ‘보이는 것도 모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는 없다. 먼저 보이는 걸 통해서 안 보이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게 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보이는 건 마음이요, 보이는 건 형상입니다. 먼저 형상을 통해서 마음을 찾는 게 효율적이라고 봅니다.
오늘의 주제
보이는 형상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그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