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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字를 통해 본 진리

영부, 精山 2012. 10. 15. 07:46

다시 한 주가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요즘 단풍구경을 하러 많은 분들이 산행을 하네요. 산은 항상 그 산인데 때를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는 걸 보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어느 화가라도 자연이 그려내는 산수화를 능가할 수는 없겠죠. 아니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여 그리는 게 화가라고 해야 겠죠. 자연이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게 인간이겠죠. 오늘도 자연의 가르침을 따라 출발을 해 봅시다.

 

어제의 주제는 <보이는 형상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그 이유는?>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세 분이 달아주셨는데, 코쿤님은 근취저신, 원취저물의 원칙에 의해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일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고, 천봉학님은 <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엎었다가 뒤집어보는 연습이 보다 쉽고 효율적>이라고 하셨군요.

 

천봉학님은 어제의 주제 자체에 대해서 이견(異見)을 피력하셨군요. <형상을 통해서 마음을 찾는 게 효율적이라고' 하시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참사람이라면 마음눈 뜨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몸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지요.>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의 눈이 아무리 정밀하다고 하여도 한계가 있지요.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영안을 떠야 한다고 예부터 가르침이 있었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육의 눈이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그것은 모든 게 상대적이기 때문에 육안이 없으면 영안을 뜬다는 게 매우 힘들기 때문이겠죠. 나는 육안으로 모든 걸 깨닫자고 한 게 아니라, 보이는 것을 통해서 안 보이는 곳으로 나아가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걸 말씀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육안을 강조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는 말이죠.

 

오히려 그걸 통해서 영안을 뜰 수 있다는 걸 말하려고 했던 겁니다. 여하튼 영안을 떠야 한다는 공통점은 명백하니 서로 다른 견해라고 할 수는 없겠죠. 그런 면에서는 코쿤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가장 가까운 것도 모르면서 먼 데 있는 걸 알 수는 없겠죠. 성경이나 다른 경전에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진리를 깨달으라고 하셨지요. 가장 가까운 곳은 바로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고 봅니다.

 

답을 해 주신 또 한 분이 계시죠. ‘물의 나라’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분인데, 그 분 또한 보이는 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맘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조의 답을 하였습니다. 그 분의 글은 수시로 올라오는 것이기에 굳이 언급을 하지 않아도 될 듯 하군요. 하지만 과연 보이는 물로써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보이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 중에서도 어찌 물 한 가지만 만능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다른 물질들은 왜 생긴 걸까요? 물의 소중함은 알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다른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굳이 물질을 통한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주장을 펼친다면 ‘물과 불’을 함께 언급하는 게 더 낫다고 봅니다. 그건 무수한 비서(秘書)에도 나와 있지요. 예를 들면 ‘水火風’이라고 한 것도 있으며, 감로수(甘露水)니 하는 것들이 과연 물에 앉아 있으라는 말이었던가요? 그런 것 보다는 ‘말씀으로 모든 걸 지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처럼 진리를 깨닫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일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방편으로 나는 ‘나를 찾아서’라는 글을 본 카페에 올리기도 했었지요. 그러나 그게 원래 방대하고 어려운 일이며,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인지라 중단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결코 멈춘 건 아닙니다. 비록 글로 표현은 안 하고 있지만 항상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광장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찾는 생각에 관한 글로 채워질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많은 분들의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오늘의 주제

진리의 眞에 대한 풀이를 자전을 근거로 해서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