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무경의 유래(由來)
현무경은 서기 1,909 기유년에 후천 5만 년의 개벽주라고 하는 강증산(姜甑山)에 의해서 출현한 경전입니다. 세상에서는 증산을 가리켜 ‘상제(上帝)’ 혹은 ‘천주(天主)’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제라는 호칭은 무등(無等) 세상을 이루려고 하신 증산의 본 뜻과는 너무도 다르게, 상하(上下)라는 차등의 개념을 지녔으니 선천의 판 안에서나 통하던 호칭입니다. 또한 天主라는 호칭도 역시 현재 카톨릭에서 부르는 것과 혼동된 가능성이 높으며, 그보다 天主라는 용어 자체가 하늘의 주인공, 혹은 하늘에 있는 주인공이라는 의미이니 이 역시 하늘이 땅을 지배한다고 본 선천의 사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호칭이라고 하겠습니다. 증산께서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천주, 혹은 상제라고 부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후세에 그를 숭앙(崇仰)하는 무리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게 맞춘 것입니다.
증산은 생전에 자신을 가리켜 ‘시속에 이르기를 개벽장이가 나올 것을 기다렸는데 내가 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개벽주(開闢主)’라고 불러야 합니다. 현무경의 유래를 논하면서 호칭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자칫, 증산을 특정 종단의 교주처럼 신격화(神格化), 혹은 우상화(偶像化)를 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개벽주는 말 그대로 선천과 후천의 개벽의 원리를 밝히고 물 샐 틈이 없이 천지도수를 짜 놓은 주인공이기 때문에, 선천에서 말하는 상제님이나 천주님이나 구세주 등과는 그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현무경은 한 마디로 개벽에 관한 내용을 총정리한 경전입니다. 개벽은 천지의 문이 인간의 의식에서 열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흔히 개벽이라고 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는 걸로 알고 있으나, 개벽주가 전해 준 것은 상전벽해라는 물질적인 차원까지도 포함한 천지인 3신의 개벽을 가리킵니다. 개벽을 마치 기울어진 지축이 바로 잡힐 적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믿는 분들도 많지만, 그것은 전혀 현무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 개벽을 논하는 분들은 마치 금방이라도 괴병이 창궐하여 세상이 급변하는 것처럼 믿고 있으나, 그 또한 현무경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개벽주는 서기 1,840 庚子년에 도솔천 내원궁에서 세상으로 하강하셨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마두를 필두로 한 선천제불보살들이 도솔천의 상제님께 탄원을 한 적이 있는데, 상제님이 아니면 세상이 진멸할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그것을 믿으라는 취지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라, 개벽의 원리를 구성하고 있는 도수(度數)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한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개벽은 철저하게 도수로 이뤄집니다. 현무경은 선천의 모든 경전과 문화를 시루에 넣고 빚어 낸 생명의 떡입니다. 성경에 예수가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베들레헴을 우스갯소리로 ‘배 둘레 햄’이라고 하는 소리가 있지만 ‘떡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는 바로 짐승과 같은 인류의 의식을 살려주는 생명의 떡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현무경은 시루에서 쪄 낸 생명의 떡입니다. 증산이란 호는 본래 개벽주가 태어난 곳에 있는 시루봉(甑 : 시루 봉)에서 유래했습니다.
개벽주가 탄강하신 정읍(井邑)은 모든 인류가 마시는 생명의 샘을 가리키고, 新月里는 후천의 인존문명은 선천의 양(태양)에서 음(달)으로 주도권이 넘어간다는 걸 일러주고 있습니다. 개벽주의 탄강에 대한 것을 상술(詳述)하는 것도 역시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省略)하기로 하고 현무경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개벽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도수(度數)입니다. 도수를 사전에서 찾으면 <1. 거듭하는 횟수. 2. 각도, 온도, 광도 따위의 크기를 나타내는 수. 3. 일정한 정도나 한도.>로 나와 있습니다.
이걸 간략하게 말한다면 도(道)와 비교하는 게 좋습니다. 道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어느 것이건 다 통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度는 도를 이루고 있는 각도(角度)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원은 道라 하며, 그걸 이루는 360은 度라고 합니다. 즉, 道는 마땅히 가야 하는 우주만물의 길을 가리킨다면, 度는 그 길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계는 道요, 시계를 이루고 있는 부품들은 度가 되며, 그 부품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을 가리켜 度數라고 합니다.
시계가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걸 이루고 있는 부품들의 중요성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선천의 모든 경전들은 道를 논하였으나, 현무경은 度數를 일러줍니다. 즉, 선천의 경전이나 종교는 겉으로 보이는 형상을 가르쳤으나, 현무경은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일러줍니다. 형상을 보기만 하는 걸로 그친다면 시계가 고장이 나도 수리해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인생이 고장이 났을 적에 수리해서 쓰는 건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나 도수를 모른다면 어쩔 수 없이 고장 난 채로 살다가 허망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무경의 도수에 정통하면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물론, 남을 도와 줄 수도 있습니다. 시계수리공은 자신의 시계도 수리하며 남의 시계도 고쳐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도수에 입각해서 개벽주는 왜 1,840 경자 년에 도솔천 내원궁을 떠나 소위 대순(大巡)을 하게 된 사정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경자 년은 갑자로부터 36년이 흐른 37년째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36이란 숫자는 4 × 9 = 36과 6 × 6 = 36에서 보는 것처럼,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4 × 9 = 36은 4상이 9변을 한 상태를 가리키고, 6 × 6 = 36은 6기가 스스로 大化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지부경에 ‘六六大化 三十六宮’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36에는 4상의 변화와 더불어 6기가 충만한 두 가지의 뜻을 내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말한다면 甲子는 선천 봄의 시작을 가리키고, 庚子는 후천 가을의 시작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것을 三易大經이라는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震木庚子는 立於申宮하고 乾金甲子는 立於寅宮하야 陰陽調和를 天地相通而連和十二分野也니라 : 진목경자(震木庚子)는 신궁(申宮)에 서고 건금갑자(乾金甲子)는 인궁(寅宮)에 서니 음양조화로 천지가 서로 통하여 12분야가 연화(連和)함이니라.>
이걸 간략하게 풀이 할 것 같으면, 하늘은 동방에서 밝아지는데 그것을 甲이라 하고, 땅의 물질은 물에서 발생하는데 그 시작을 子水라고 봅니다. 이 둘을 합한 甲子로부터 천지가 시발(始發)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봄을 기준으로 본 것이요, 만일 열매를 추수하는 가을을 기준으로 한다면 서방을 상징하는 庚子라고 봅니다. 그런데 서방의 하늘을 庚으로 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땅에서의 열매를 가리킨다면 子가 아니라 申으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렇게 되면 庚子가 아닌 庚申으로 후천의 시작을 알려야 제격입니다. 그런데도 震木庚子를 후천의 시작이라고 한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그것은 용담도의 하늘은 己庚이 중궁으로 들어가며, 땅의 출발은 未에서 子가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선천 낙서의 중궁에는 戊己가 들어갔으며, 땅의 출발은 북방에서 출발한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렇게 되는 근거와 이유에 대해서는 현무경의 본론에서 상술할 것이지만, 개벽주께서 ‘묵은 하늘이 사람 죽이는 공사만 보고 있다’고 하시면서 ‘천지를 물샐틈없이 뜯어 고친 개벽의 결과’가 용담도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