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상서 중의 하나인 낙서는 우임금이 황하(黃河)에서 치수(治水)작업을 할 적에 발견한 거북의 등에 새겨진 문양(文樣)이었습니다. 우임금은 그 이치를 깨달아 무사히 9년간의 홍수를 다스렸습니다. 그 후에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 주공이 그 이치를 팔괘로 그어 인류사에 복희 성인 다음으로 2획을 그었습니다. 복희와 문왕이 그은 1획과 2획에 의해 인류의 문명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동방의 조선에서 제3획을 그었으니 수운선사와 화운후사에 의한 동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수운선사는 仙之胞胎하는 운수이므로 영부를 받기는 하였으나, 그걸 세상에 내어 놓는 분은 佛之養生하는 운수에 해당하는 증산이라고 삼역대경의 기록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치에 부합(附合)하게 개벽주는 ‘수운은 동세(動勢)를 맡았고, 나는 정세(靜勢)를 맡았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수운 대신사께서 서기 1,824 갑신(甲申)년에 탄강하신 것도 천운(天運)이 닿은 甲木으로 申金을 세우는 도수대로 정해졌다는 것을 삼역대경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상극시대에서 보여 준 金克木이 아니라, 金極生木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밝혀주는 상징입니다. 개벽주의 탄강이 서기 1,861 신미(辛未)년에 이뤄진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으니, 서방의 辛金 열매가 가을에 드러나는 상징입니다. 이처럼 후천을 알리는 성인들의 탄생에는 철저한 우주의 도수가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840 경자 년에 대순을 시작한 후로 21년 만에 수운 대신사님께 주문과 영부를 내려보내 동학을 창도하게 한 하늘의 도수는 또 무엇일까요? 21이라는 숫자는 3신이 내면을 밝히는 최소한의 상징수 3 × 7이기 때문입니다. 수운 대신사께서 탄강하신 甲申년도 실은 甲子로부터 21차가 되는 해인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이런 도수에 대한 것은 앞으로 현무경의 본론을 해설하면서 많이 언급할 것이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계속하여 현무경의 유래에 대한 것을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동학의 창건으로부터 후천의 개벽은 그 머리를 들게 되었는데, 50년에 이르러야 비로소 대연지수(大衍之數) 49를 뛰어넘는 법이기에 현무경은 서기 1,909 己酉년에 성편을 하게 된 것입니다. 현무경 마지막 문구를 ‘布敎五十年工夫’라고 기록한 데에는 이런 원인이 있습니다. 천하 대순으로부터 현무경이 성편된 햇수는 70년입니다. 개벽주가 남기신 ‘삼인동행칠십리오로봉전이십일(三人同行七十里五老峯前二十一)’은 이런 사정을 잘 대변해 주는 시구(詩句)입니다. 여기서의 三人은 특정한 인물을 가리킨 게 아니라, 하도, 낙서, 용담이라는 3대 상서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런데 三天이라 하지 않고 굳이 三人이라고 하여 마치 특정인을 지칭한 것처럼 혼동을 줄 가능성을 열어두었느냐 하면, 三은 본래 人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一은 天이요, 二는 地이며 人은 三입니다. 본래 七은 우주내면에서 三神이 하나 된 일곱 번 째의 十字를 가리킨 것인데, 그것은 본래 열 번째의 十字인 大十字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때의 大十字는 천지인 3대축이 하나 된 것이므로 三人同行이라고 한 것이며, 7은 곧 10이므로 七十里라고 하였습니다. 五老峯前二十一은 용담도의 5진뢰가 옛 봉우리가 되는데, 그 자리에는 예전 문왕도 6건천이 있었으니, 1감수, 2곤지, 3진뢰, 4손풍, 5중앙, 6건천을 모두 합한 21을 가리킵니다. 즉, 천하 대순으로부터 동학을 창도하기까지는 5로봉전이라 하였으며, 그 후로부터 혀무경을 성편하기까지를 포교 50년 공부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으니, 개벽을 단행하는 천지공사를 시행하기 시작한 해가 서기 1,900 경자 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천하 대순을 시작한 경자 년으로부터 정확히 60 환갑이 지난 도수인데, 1,900 경자 년에서 다시 60주년이 지난 1,960 경자 년에 5.16군사 혁명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면 다음 60주년이 경과하는 서기 2,020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게 자칫 잘못 하다가는 예언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에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므로 더 이상 언급 하지는 않겠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신기하지 않나요?
그런데, 문제는 경자 년은 60년마다 어김없이 순환하는데, 하필이면 왜 서기 1,840 경자년과 1,900 경자 년에 이와 같은 일들이 발생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상세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왜 현무경이 하필이면 서기 1,909 己酉 년에 성편한 이유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 답은 선천의 仙法을 황제(黃帝)가 정리한 후로부터 일통수(一統數) 4,560 년이 경과했기 때문입니다. 일통수라는 것은 天行이 1도 퇴차(退次)하는 데에 76년이란 시간이 흐르는데, 그것이 60도를 경과한 도수를 일통수라고 부릅니다. 천행이 1도 퇴차 한다는 말은 태초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출발한 태양과 달이 연월일시까지 완벽하게 일치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본래 태양과 달은 각기 공전하는 주기가 달라서 서로 다시 만나는 날까지는 19년이 걸립니다.
태양 365와 235/940일 × 19년 = 6,939와 705/940일
태음 354와 348/940일 × 19년 + 29와 499/940일 × 7년 = 6,939와 705/940일
위에서처럼 6,939와 705/940일로 일치하기는 하지만, 하루가 온전하게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4배를 곱한 27,759일(6,939와 705/940일 × 4)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19년 × 4 = 76년이 걸리는 셈인데, 이를 가리켜 ‘天行 1도 퇴차‘라고 합니다. 天氣는 6기로 운행하는 법인데, 1기가 운행하는 기간은 60일씩으로 한정 되어 있습니다. 또한 천간과 지지가 한 번 만나는 기간을 환갑이라고 하는데 그 역시 60년입니다. 선천 선법을 황제가 정리한 己酉 년으로부터 천행 60도가 퇴차 한 기유년이 되는 때가 바로 서기 1,909 기유 년이기 때문에 天道의 운행에 맞추어 후천의 개벽을 단행하고 그 증거물로 현무경을 내 놔야 하는 것이 개벽주의 임무이기 때문에 그 시기에 맞추어 탄강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럼, 왜 己酉 년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그 답은 물질의 중심은 본래 무진(戊辰)이지만, 정신의 중심은 己酉이기 때문입니다. 천간의 중심은 戊己 둘이 있는데, 戊는 양(陽)의 중심이요, 己는 음(陰)의 중심입니다. 또한 12지지에서 3양의 극처는 辰巳之間이며, 3음의 극처는 戌亥之間입니다. 선천에서는 양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하늘에서도 양의 중심인 天干 戊와 3양의 극처인 地支 辰이 합한 戊辰년을 원년으로 삼지만, 후천에서는 음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음의 중심인 天干 己와 3음의 극처인 地支 酉를 합한 己酉년을 원년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도수입니다. 그런데, 음의 극처는 戌亥라고 하였는데 갑자기 酉를 음의 극처라고 하니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그러나 선천과 후천의 변화, 즉 개벽은 <五七一>로 벌어진다는 걸 이해하면 금방 수긍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 것 같으면, 선천의 子는 丑 - 寅 - 卯 - 辰 - 巳라는 5단계를 거쳐서 1水에서 2火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이걸 거꾸로 보면 巳는 午 - 未 - 申 - 酉 - 戌 - 亥 - 子까지 7단계를 거치면서 子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본래는 12지지이므로 절반인 6만큼 이동을 해야 하지만, 음은 양을 만나야 하고, 양은 음을 만나야 제대로 짝을 맺는 법이기에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진 셈입니다. 그러므로 선천의 辰이 있던 곳으로는 酉가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酉는 鷄(닭)요, 辰은 龍(용)이므로 이 둘이 하나 되는 걸 가리켜 ‘계룡‘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즉, 현무경이 성편하는 순간에 진계룡이 이뤄졌습니다.
이상, 현무경이 성편한 시기와 그 까닭에 대한 언급을 하였고, 다음에는 현무경이 지금까지 전해 진 경로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현무경은 1,909 기유 년에 개벽주의 손으로 직접 성편을 하였으며, ‘내가 책 한 권을 정읍에 두리니 그 책이 나오는 날에는 세상사를 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정읍에 두었습니다. 39세에 화천을 하시면서 개벽주는 현무경이 들어 있는 법궤(혹은 둔궤)의 열쇠를 고수부(高首婦)에게 맡겼습니다. 그때에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임자가 아닌 자가 볍궤를 열려고 하면 벼락을 맞으리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전남 순천에서 약관(弱冠)에 쌍암면장을 하던 庚辰生(1,880년) 장기준(張基準)은 일제가 사사건건 면정(面政)에 개입하는 데에 울분을 품고 사직을 합니다. 그리고는 일왕을 타도하기 위하여 결사대를 조직합니다. 그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날 밤, 홀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해 집으로 가겠다고 하자, 혹시 잘못 되면 대사를 그르친다면서 동지들이 만류(挽留) 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가는 길인 지라 마지막 모친에 대한 인사만큼은 해야 하겠기에 ‘만일 동네 닭들이 울기 전에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해산을 하라’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모친이 눈치를 채고 허리춤을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하게 됐습니다.
그때 동네에 있는 닭들이 일제히 우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아직 닭이 홰치는 새벽이 되려면 시간이 멀었는데, 그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그는 거사를 포기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본의 아니게 동지들을 배신하게 된 지라, 그는 부끄러움과 울분으로 지새다가 그만 33세(1,912 壬子年)에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문둥병은 불치의 병인지라, 아무 대책이 없이 선산에 움막을 짓고 격리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는 그에게 어느 날, 金化淑이란 사람이 찾아 와 태을주를 주송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가 정성을 다하여 태을주를 주송한 결과, 신기하게도 문둥병이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김화숙을 찾아가 태을주의 내력을 물었는데, 전주에 있는 태운 김형렬에게 문의하라고 하였습니다. 태운 김형렬을 찾았더니 그는 다시 정읍 대흥리에 있는 고수부를 찾아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수부와 장기준이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가 계축년(1,913년) 9월이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는 나중에 보천교를 창시하여 자칭 차천자(車天子)로 행세하게 되는 月谷 차경석도 함께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