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 분은 경진 생으로 동갑(同甲)이었기에 후세 사람들은 ‘삼룡(三龍)’이라고도 부르게 되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개벽주 생존 시에 고수부에게 검정 소를 한 마리 사준 적이 있는데, 생활이 곤궁해져 팔아 버린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장기준은 가지고 간 돈으로 그 검정 소를 다시 사라고 하면서 생활비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방안에 있는 법궤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고수부가 열쇠를 장기준에게 건네면서 한 번 법궤를 열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차경석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그깟 돈 좀 받았다고 아무한테나 열쇠를 내주느냐?’고 하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가 대문을 나서기도 전에 방안에서 환성이 나왔습니다. 사실 차경석은 전에 몇 차례인가 자신이 열어보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하늘에서 우르릉 하는 뇌성이 들려 겁이 나는 바람에 열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차경석이 들어가 보니 법궤가 열려 있기에, 그 안을 들여다보니 세 개의 심지가 보였습니다. 그 한 개에는 ‘布政度數 車京石’이라고 쓰여 있었고, 또 한 장에는 ‘律呂度數 安乃成’이 있었으며, 마지막에는 ‘大學度數 張基準’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차경석이나 안내성은 개벽주를 좇던 종도들이었으나, 장기준은 전혀 생면부지였는데 대학도수를 맡긴다는 글을 보게 되자, 차경석과 고수부는 장기준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경석이 손을 내밀면서 큰일을 도모하자고 하였으나, 장기준은 ‘나는 그럴 위인이 못 된다’고 하면서 현무경을 필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이 계축년 9월 24일(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내용을 모르고 있던 차에, 乙卯년(1,915년) 3월에 전주 銅谷에서 김형렬이 도통했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 그가 현무경을 풀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지니고 찾아갔습니다. 김형렬은 일본이 망하게 하기 위해서는 화둔(火遁)을 명산 꼭대기에 해야 한다고 하여 많은 무리들이 추종하였으나, 예정한 기일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실망하여 무리들이 흩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丁巳년(1,917년) 정월에 장기준도 깅형렬의 그릇됨을 깨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3월 중순부터 마을 뒷산의 제왕봉(帝王峯)에서 개벽주가 말씀하신 대로 서전서문(書傳序文)을 만독(萬讀) 하는 수련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해 음 6월23일에 활연대통(豁然大通)하여 현무경의 비의(秘意)가 풀리게 되었으니, 신기하게도 개벽주가 화천하신 1909 기유년 6월 24일로부터 만 8년이 경과하여 9년 차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현무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지 않고, 1920 庚申년 음 4월 5일에 인류 최초로 현무경대학법방을 개설하셨습니다. 이것은 수운 대신사께서 1,860 庚申년 음 4월 5일에 동학을 전수받으신 것과 같은 도수입니다. 그리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시다가 春來 柳士云에게 법통을 넘기시고 선화(仙化)하시니 壬戌년(1,922년) 3월 22일이었습니다. 춘래장 밑에서 도생들이 나오니 대표적인 분이 모산(母山) 朴日門이요, 그 밑에서 무수한 도생들이 배출되기도 하고 分派를 하기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