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여러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큰 運數를 받으려 하는 者는 書傳序文을 많이 읽으라 하시고 또 일러 가라사대 <且生於數千載之下하야 而欲講明於數千載之前이 亦已難矣>라는 한 句節은 淸水를 떠놓고 읽을 만한 句節이니라 하시니라> 라는 개벽주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큰 운수’와 서전서문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서전은 서경(書經)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상고(上古)시대 중국(中國)의 요순(堯舜)부터 주(周)나라 때까지의 덕치(德治)를 행한 문장(文章)을 공자(孔子)가 수록(收錄)한 책입니다.
채침(蔡沈, 1167~1230)은 남송(南宋) 시대의 유학자로서, 자(字)는 중묵(仲默)이고 호(號)는 구봉(九峰)이며, 건양(建陽, 지금의 복건[福建]) 사람입니다. 채원정(蔡元定)의 셋째 아들로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고,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에서 주희(朱熹)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경원(慶元) 2년(1196) 경원당금(慶元黨禁)에 연루되어 관도주(官道州, 지금의 호남[湖南] 도현[道縣])로 유배된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부자가 짚신이 구멍이 나도록 3,000리를 걸어가 독서로 소일하고 강학(講學)을 사사했다고 합니다. 뒤에 구봉산(九峰山)에 은거해 오로지 <상서(尙書)>를 학습했으며, 약 십 수 년 동안 심오하고 자세함을 밝혀내 아버지와 스승의 말씀에 부끄럽지 않았으며, 자주 선유(先儒)들이 이르지 못한 것을 밝혔습니다. 학자로서 ‘구봉선생(九峰先生)’으로 칭해졌으며, 주희가 만년에 채침에게 명해서 <서집전(書集傳)>을 편찬하게 했습니다. 채침은 소옹(邵雍 - 소강절)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있는 ‘선천수학(先天數學)’에서 <상서> 홍범(洪範)을 연구해 천지(天地)ㆍ인물(人物)이 모두 숫자에서 파생된다고 생각해서, <天地之所以肇者數也 人物之所以生者數也 萬事之所以失得者數也 : 천지는 숫자에서 시작되고, 사람ㆍ사물은 숫자에서 생기며, 모든 일은 숫자에서 얻고 잃음이 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소정(紹定) 3년(1230)에 타계하였는데, ‘문정(文正)’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습니다.
선생 주문공(朱文公 : 朱熹)은 채침(蔡沈)에게 서전서문(書傳序文)을 지으라고 명(命)하였는데, 주희는 스승이자 장인 어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개벽주께서는 굳이 서전서문을 많이 읽어서 큰 기운을 받으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것이 후천 개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개벽을 하려면 큰 기운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선천의 낙서로부터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채침(蔡沈)이 서전서문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蔡는 ‘거북 채, 점치는 풀 채’이고 沈은 ‘가라앉을 침, 깊을 심’이라는 뜻이 있으니, 이를 합하면 채침은 ‘낙서의 심연(深淵)’이 되는군요. 또한 그의 스승인 주자(朱子)는 낙서의 마지막인 9리화를 상징하고 있으니, 9에서 2가 착종하여 11귀체로 큰 기운을 받아야 한다는 걸 암시하고 있습니다.
서전서문의 핵심은 <精一執中은 堯舜禹相授之心法也 建中建極은 商湯周武相傳之心法也요>라고 한 것입니다. 즉 정일집중과 건중건극을 서로 주고받는 마음의 법으로 세우라는 가르침을 기록한 글입니다. 그런 것은 결국 후천의 역법인 황극력이 기사 삼월 기망일(서기 1989년 음 3월 16일)부터 펼쳐질 것을 일러주는 게 또한 서전서문입니다. 개벽주가 성편해 놓으신 현무경의 법칙에 의하면 복중신명팔십년(腹中神明八十年)의 기간이 지나면 황극력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현무경이 성편된 해가 서기 1,909 己酉년이므로 80년이 경과하면 서기 1,989 기사년이 되는데, 그 해 음 3월 16일부터 정월 초하루가 시작할 것을 ‘嘉靖己巳三月旣望武夷蔡沈序‘라고 마지막에 기록해 놓은 게 바로 서전서문입니다.
서전서문이 성편한 때는 기사년이었으나, 그것을 명한 때는 기미년(1,199년) 겨울이었습니다. 이 기미년은 매우 중요한 도수인데, 첫 번째는 도솔천(兜率天)에서 주세불(主世佛)이 하강(下降)하여 천하대순을 시작한 경자(庚子)1840년에서 최수운대신사(崔水雲大神師)께서 경주(慶州) 용담(龍潭亭)으로 출가를 하신 서기 1859 기미(己未)年 겨울이 그 첫 번째요, 또 하나는 1,919(己未)年에 대한(大韓)이 후천(后天)의 원년(元年)으로 시조국(始祖國)이 되어, 전 세계(全世界)가 존망(尊望)하는 경원(慶元)이 되므로 연호를 경원이라 하였습니다. 천하대순으로부터 21년 차에 후천의 학문인 동학을 이루기 위한 솔처자환서(率妻子還棲)를 己未十月에 수운대신사를 통해 이루어졌고, 81년 차에 후천의 시원국이 되는 기미독립운동을 하였으니, 이 모두가 철저한 도수에 의한 것입니다.
가정(嘉靖)은 ‘아름답고 편안한’ 후천의 평등세상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武夷는 본래 주자가 은거하시던 산에 지었던 정사(精舍)의 이름입니다. 무이정사에 기거하시면서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었던 九曲을 가리켜 무이구곡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것은 선천에서 후천으로 9변과 9복을 하는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주자가 노래한 것은, 후천의 시작은 낙서의 맨 마지막 9리화 朱子에서 9복하는 것임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정에 의해 서전서문은 평범한 경문이 아니라, 후천의 황극력이 펄쳐지는 경로를 전해 주는 도수이므로 매우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