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시기에 홍순언(洪純彦, 1530~1598)이라는 역관(통역사) 한 분이 있었다. 어려서는 매우 불우했지만 그래도 늘 의기(義氣)가 있었다.
한번은 중국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가다가 통주(通州)라는 곳에 이르렀다. 하룻밤을 묵으면서 저녁에 술자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미색이 아주 뛰어난 한 중국 여인을 보고 마음이 혹했다. 그래서 주막 할미에게 부탁하여 술시중을 들게 했다.
그런데 여인은 소복(素服)을 입고 있었다. 까닭을 물었다.
“제 부모가 연경에서 벼슬하시가 불행히 돌림병에 걸려 두 분 다 돌아가셨는데, 관이 아직 여관에 있사옵니다. 고향으로 모셔가 장사지내려니 장사지낼 밑천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이렇게 몸을 팔고 있나이다.”
여인은 말을 마치자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렸다. 홍순언이 듣고는 불쌍히 여겨 그 장례비를 물었더니 3백금이 필요하다 했다. 그래서 전대를 털어서 다 주고는 여인을 건드리지 않았다. 여인이 성명을 물었지만 홍순언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대인께서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소녀도 감히 이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2)
훗날 여인은 중국 예부시랑(禮部侍郞) 석성(石星)이라는 사람의 처가 되었다. 예부시랑은 지금의 외무부 차관쯤 되는 고위직이었다. 그는 부인에게서 전에 홍순언과 있었던 일을 듣고는 홍 공의 의리를 높이 여겼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반드시 홍 통역관이 왔는지를 물었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조상들을 왕으로 호칭을 높여주는 문제로 중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10번이나 사신을 보냈으나 모두 허락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1584년에는 홍순언 공이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갔다. 갑자기 한 기병이 쏜살같이 말을 달려와서 홍 공을 찾으며 말했다.
“예부시랑께서 공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하러 나왔습니다.”
좀 있다 보니, 계집종 10여 명에 둘러싸여 한 부인이 장막 안에서 나왔다. 홍 공이 놀라서 피하려 하자, 예부시랑 석성이 말했다.
“그대는 통주에서 은혜를 베푼 일을 기억하시오? 내가 부인 말을 들으니 그대는 참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인데, 이제야 만나게 되니 내 마음이 크게 기쁩니다.”
그러자 부인이 꿇어앉아 절을 했다. 홍 공은 황공하여 엎드려 사양했다. 예부시랑 석성이 말했다.
“이것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절하는 것이니 받으시지요.”
이어서 부인이 말했다.
“공의 높으신 은혜를 입어 부모의 장례를 지낼 수 있었기에 그 감격이 마음에 사무쳤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큰 잔치를 벌이고, 부인은 잔을 따라 올렸다.
(3)
마침내 예부시랑은 조선 사신이 이번에 왜 왔는지를 물었다. 홍순언 공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석성이 말했다.
“그대는 염려하지 마시오.”
그리고는 회동관(會同館)에 머문 지 한 달 만에 태조 이성계의 조상을 왕으로 부르는 그 일을 허락받았다. 예부시랑 석성이 도움을 준 것이었다.
이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부인은 나전함 열 개에 오색 비단을 열 필씩 담아주며 말했다.
“이것은 제가 손수 짜면서 공이 오시기를 기다렸으므로 지금 공께 바치고자 합니다.”
홍 공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런데 압록강 가에 도착했을 때 말을 탄 짐꾼들이 따라와서 그 비단을 두고 갔다. 비단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 두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4)
임진년(1592)년 왜놈들이 침입하자 임금은 압록강까지 피하고 중국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중국 관리들은 그때 압록강을 지키면서 형세를 지켜보자는 의견도 있었고, 남의 나라 일인데 우리가 꼭 끼어들 것까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석성은 병부상서(국방장관)였는데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는 먼저 무기를 보내주었다.
조선이 끝내 왜놈에게 멸망치 않은 데는 석성의 힘이 컸던 것이다. 나중에 홍순언은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훈되고 당릉군(唐陵君)으로 봉해졌다.
뒷날 사람들은 말했다.
“홍 공이 남의 궁한 일을 도운 의리는 실로 가상하다. 또 부인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반드시 갚은 것도 더욱 가상히 여길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