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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은 모두 명당자리라는데 왜 조선왕실은 콩가루 집안일까

영부, 精山 2013. 2. 15. 08:41

왕릉은 모두 명당자리라는데 왜 조선왕실은 콩가루 집안일까

 

조선왕릉은 조선 최고의 명당자리만을 찾아다니면서 왕릉을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왕실의 자손들이 엄청난 복을 많이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태종처럼 형제간에 피바람이 부는 살육을 자행하고,
세조는 조카를 죽였으며, 연산군과 같은 희대의 폭군이 나오며,
심지어 인조는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영조 역시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등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콩가루 집안이었을까요?

제대로 된 풍수(사대부풍수, 이에 반해

무덤풍수,발복풍수는 짝퉁풍수입니다.) 에서 말하는
명당의 조건은,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단순히 좋은 조건의

좌청룡, 우백호만 찾고 남향을 한다고 해서

명당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풍수에는 여러가지 이론이 있는데, 그중 핵심적인 것이
동기감응(同氣感應 또는 부자감응) 이라는 것과
소주길흉론(所主吉凶論 또는 적덕(積德)사상)이 있습니다.
(특히 저는 소주길흉론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동기감응은 조상으로부터

몇 대를 내려오든 후대 현시점에 이르기까지
그 전체를 하나의 연속적인 연결체로 간주하며,
명당 혈의 유골은 마치 단일 생명체인 양

계속 같은 기운이 내리 이어지며 후손에게
동기감응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조상이 명당 혈을 차지한다면

후대인 2~3대까지 그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명당 혈자리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명당 혈자리를 찾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말에 조상의 음덕(蔭德) 이라는 말이 있지요?
조상이 덕을 쌓으면 후손이 그 음덕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적덕사상 입니다.

따라서 명당 혈+적덕(積德) 두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후손에게 복이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명당 혈자리를 찾는 것에는 모두 혈안이 되어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덕을 쌓는 일에는 다들 관심이 없지요?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 보다는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린 게지요.

이런 이유 때문에

조선왕실이 아무리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콩가루 집안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경주 최부잣집이

10대 이상에 걸쳐 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도
대대로 적덕(積德)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과객을 후하게 접대하라
- 만석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등

우리나라의 풍수는 삼국시대부터 자생적인 풍수가 발생한 이후,
당나라 등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진화를 거듭한 뒤, 도선국사에 의해 1차로 집대성 됩니다.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도 제2훈, 제5훈, 제8훈에

각각 풍수와 밀접히 관련된 부분이 보입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풍수는

주로 지식계층인 승려들이 주도를 했습니다.

이것이 조선에 이르러서는

정권찬탈의 당위성과 민심수습을 위해서
왕실에서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서

적극적으로 풍수지리설을 이용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풍수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져
사대부가 풍수지리학을 모르고서는

제대로 행세할 수가 없었을 뿐더러
선비,승려들 사이의 풍수가 민간까지 확대재생산 되어

민간에서는 거의 신앙화 되어갑니다.

또한 조선은 효에 충실한 유교사회 였기에 후기로 올수록
조상의 묘에 대한 음택풍수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사회의 폐단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무덤풍수, 발복풍수가 성행하게 되지요.

심지어 조선왕릉에 대한 음택풍수는

멀쩡한 정권이 바뀌는 일까지 생길 정도입니다.
중종때 장경왕후 왕릉택지를 문제삼아

김안로가 옥사를 일으켜 정권을 잡게된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풍수지리는 사대부뿐만 아니라

역대 조선의 모든 왕들까지도 철저히 신봉했습니다.
왕세자로 있다가 왕으로 등극하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선왕의 국장을 치르는 일입니다.

조선의 국왕즉위식은

축하의 자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눈물의 자리입니다.
즉, 선왕의 임종후, 소렴과 대렴이 끝나는 5일후에 즉위하게 되는데
부왕의 빈전 앞에서 올리는 즉위식이 축하의 자리일 수는 없지요.

그래서 조선의 국왕은 자신을 가르켜

"과부의 아들" 이란 호칭으로 "과인"으로 부릅니다.

그때 새 국왕은 선왕을 명당지에 묻어야

새왕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이때 선왕을 모실 명당을

누가 찾느냐에 따라 정권이 좌우되고,
심지어 흉당을 명당으로 잘못 상소하면
새왕조의 역적이 되어

유배길을 떠나거나, 심할 경우 사사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영조가 죽고 5일후에 왕위에 오른 정조에게

황해도사인 이현모는 다음과 같이 상소합니다.
"선왕께서 이미 생전에 정성왕후께서 묻힌 서오릉의 홍릉 옆에
신후지지(살아서 미리 봐둔 무덤자리)를 정해 두셨으니

선왕의 뜻을 따름이 옳은 줄 아룁니다."

그러나 이현모는 줄을 서도 너무 잘못 선 경우입니다.
새왕인 정조의 의중을 전혀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에 대한

정조의 복수는 100여년전 효종이 묻혔다가
여주로 천장하느라 비워진

동구릉의 파묘자리에 영조를 묻어 버립니다.

남이 쓰던 파묘자리에 무덤을 쓰는 것은

흉당 중에 흉당입니다.
정조의 복수심이 어느 정도 였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지요.

때문에 이현모는 삭탈관직 당합니다.
그러니 조선의 사대부들은 목숨을 걸고, 열심히

풍수지리를 공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서오릉의 정성왕후릉(홍릉)은
오른쪽 옆이 공터로 남아있는

유일한 왕릉입니다.(이를 우허제 라고 합니다.)

(펌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