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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도 이야기 - 4

영부, 精山 2013. 3. 25. 08:08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숫자를 열개로 보는 경우

     → 음양5행이 기준이다 :     1의 음양(1, 6水)

                                           2의 음양(2, 7火)

                                           3의 음양(3, 8木)

                                           4의 음양(4, 9金)

                                           5의 음양(5, 10토)

                                          합 2 × 5 = 10개

 

숫자를 열한개로 보는 경우

                   → 3신8괘가 기준이다 :    天神(1건천, 8곤지)

                                                      地神(3리화, 6감수)

                                                      人神(2태택, 7간산)

                                                            (4진뢰, 5손풍)

                                                     합 3신 + 8괘 = 11

 

또 하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왜 하도의 중심에는 백점 5가 있고, 상하에는 흑점 5가 있을까? 그것은 하도는 하늘을 기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늘은 무형이기 때문에 텅 빈 白空으로 상징하며, 땅과 인간은 유형이기 때문에 黑色으로 상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따라서 하도의 한 중심의 백5점은 天5요, 상하의 흑5점은 각기 地와 人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것을 낙서와 문왕도, 용담도와 비교한다면, 문왕도의 중심에는 백5점이 들어 있으니, 그것은 양을 위주로 한 것이며, 용담도의 중심에는 흑6점이 들어 있으니, 그것은 음을 위주로 한 것이다.

 

이처럼 白空이 모든 사물의 핵심이라는 걸 잘 보여주는 것으로 ‘환단고기’ 中 삼성기의 첫 문장에 ‘有一神在斯白力之天’이라는 게 있다. 이걸 임승국 교수는 ‘一神이 시베리아의 하늘에 있었다’고 풀이하였는데, 斯白力之天의 斯를 ‘시’라고 읽는 우(愚)를 범하여 시베리아로 풀이하였다. 하지만 斯는 아사달(阿斯達 : 아침의 밝은 땅), 사라(斯羅 : 신라의 옛 이름), 사로(斯盧 : 신라의 옛 이름)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大光明’을 가리킨다. 이처럼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神 = 빛>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斯白力之天은 형상의 하늘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빛의 근원을, 즉 깨달음의 근원을 가리킨다. 하도의 중심에 있는 백점 5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5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자. 왜 하도의 중심에는 5를 집어넣고 11귀체가 되어 대정수 55를 두기로 천지가 약속을 했을까? 사실 대정수 55는 건(9)과 곤(6)의 조화인 54에 본바탕 1태극을 합한 수다. 1태극이라고 하지만, 실은 3신이 합일한 상태이니 54 + 3 = 57이라는 것도 간과하면 안 된다. 57은 仁數라고 하는 것으로, 因數로도 통한다. 仁이나 因은 다 같이 ‘근원’ 혹은 ‘씨’를 가리킨다. 천지의 씨를 가리켜 人이라고 하며, 천지가 약속을 하는 징표(徵表)를 印이라 하고, 그런 걸 빈틈없이 처리하는 도구를 가리켜 刃이라 하며, 그런 걸 말씀으로 표기하면 認이라고 한다. 이처럼 ‘인’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니 깨달음을 원한다면 이런 문자에 대한 공부도 심도(深度)있게 해보기를 권한다.

 

항간(巷間)에는 ‘신성(神性)은 배우지 않아도 안다. 지식을 쌓지 않아도 본성은 다 알고 있다. 당신은 신이기 때문에 굳이 지식을 쌓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개벽주로 오신 증산께서도 ‘공부하지 않고 어찌 알리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필수적인 지식이 있는가 하면, 우환(憂患)이 되는 지식도 있는 법이다. 필수적인 것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면 그야말로 과거 선천에서 추구하던 ‘길 없는 길’을 답습(踏襲)하는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