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간 남몰래 한센인 돌봐온 팔순 치과의사> 본문
"가슴으로 하는 사랑이 어떤 건지 배웠습니다"
한센인들, 강대건 씨에 감사패 전달
(서울=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 "병원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던 한센인들에게 크나큰 은인이시죠.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 입구의 허름한 건물 2층에 자리잡은 한 치과에서 조촐한 감사패 전달식이 열렸다.
30년 넘게 전국을 돌면서 한센인들을 무료로 진료해 온 이 병원 강대건(81) 원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러 전국의 한센인 대표들이 찾아온 것이다.
'한센인의 대모' 엠마 프라이징거 한국가톨릭자조회 총재와 가톨릭 한센인 모임인 이 단체의 박명서 회장도 자리를 함께했다.
강 원장은 1979년부터 방방곡곡을 다니며 한센병 환자를 돌봐 오다가 고령과 건강 문제로 진료를 그만두기로 했다.
강 원장이 무료봉사를 시작한 건 우연찮은 기회에 한센인의 처참한 실상과 그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목격한 뒤였다.
"어떤 병원에 한센인 한 분이 진료를 받으러 갔어요. 그런데 병원 쪽에서 돈을 집어던져주면서 '여기는 올 데가 아니다. 병원 문 닫게 하려고 작정했느냐'며 내쫓더라구요. 그때부터 진료를 하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주말이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센인들을 찾아다녔다.
한센인들에게 만들어 준 틀니만 해도 어림잡아 5천개. 진료한 환자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두꺼운 공책으로 된 진료기록부만 10권이 넘는다.
진료비는 물론 처음 몇 년 동안은 재료비조차 안 받고 자비를 들여 가며 완전 무상진료를 했다. 그러다가 "그렇게 하면 오래 할 수 없다"는 주위의 권유를 못 이겨 재료값만 받기로 했다.
재료비를 한 푼이라도 더 받은 사실을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한센인 공동체에 전액 기부했다.
기공비를 아끼려고 틀니 등을 직접 만드느라 정작 자신의 병원 일에는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지만 그의 선행은 종교를 넘어섰다.
한센인과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 무료진료 말고도 인근의 인창 중·고등학교, 동명여자 중·고등학교, 구세군 사관학교에까지 그의 손길이 미쳤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행을 일절 알리지 않았다. 행여 주위에서 그럴 기미가 보이면 한사코 거절하면서 33년 동안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 번은 큰상을 받기로 사실상 결정된 상황에서 "앞으로는 안 할 테니 상을 받지 않겠다"며 끝까지 고사한 적도 있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인 그의 선행을 반대했지만 나중엔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자가 돼 줬다.
가톨릭자조회 박명서 회장은 "옛날에는 한센인들이 병원 진료는 엄두도 못 낸 것은 물론이고 시내버스도 못 타고 잠잘 곳도 없어 공동묘지 옆에서 자는 일도 많았다"며 "이만큼 사람대접 받고 사는 건 모두 강 원장님 같은 분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강 원장이 30여년 간 이렇게 자신을 희생해 가며 얻은 것은 무엇일까.
"김수환 추기경께서 사랑은 머리에서부터 가슴까지 온다고 말씀하셨는데 가슴으로 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봉사에서 얻은 보람과 기쁨이 너무 커서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어요. 다시 태어나도 꼭 다시 할 겁니다."
강 원장은 이날 찾아온 한센인 대표들에게 "제가 한 일도 없는데 먼길 오시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라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kong@yna.co.kr
한센인들, 강대건 씨에 감사패 전달
(서울=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 "병원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던 한센인들에게 크나큰 은인이시죠.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 입구의 허름한 건물 2층에 자리잡은 한 치과에서 조촐한 감사패 전달식이 열렸다.
'한센인의 대모' 엠마 프라이징거 한국가톨릭자조회 총재와 가톨릭 한센인 모임인 이 단체의 박명서 회장도 자리를 함께했다.
강 원장은 1979년부터 방방곡곡을 다니며 한센병 환자를 돌봐 오다가 고령과 건강 문제로 진료를 그만두기로 했다.
강 원장이 무료봉사를 시작한 건 우연찮은 기회에 한센인의 처참한 실상과 그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목격한 뒤였다.
"어떤 병원에 한센인 한 분이 진료를 받으러 갔어요. 그런데 병원 쪽에서 돈을 집어던져주면서 '여기는 올 데가 아니다. 병원 문 닫게 하려고 작정했느냐'며 내쫓더라구요. 그때부터 진료를 하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주말이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센인들을 찾아다녔다.
한센인들에게 만들어 준 틀니만 해도 어림잡아 5천개. 진료한 환자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두꺼운 공책으로 된 진료기록부만 10권이 넘는다.
진료비는 물론 처음 몇 년 동안은 재료비조차 안 받고 자비를 들여 가며 완전 무상진료를 했다. 그러다가 "그렇게 하면 오래 할 수 없다"는 주위의 권유를 못 이겨 재료값만 받기로 했다.
재료비를 한 푼이라도 더 받은 사실을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한센인 공동체에 전액 기부했다.
기공비를 아끼려고 틀니 등을 직접 만드느라 정작 자신의 병원 일에는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지만 그의 선행은 종교를 넘어섰다.
한센인과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 무료진료 말고도 인근의 인창 중·고등학교, 동명여자 중·고등학교, 구세군 사관학교에까지 그의 손길이 미쳤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행을 일절 알리지 않았다. 행여 주위에서 그럴 기미가 보이면 한사코 거절하면서 33년 동안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 번은 큰상을 받기로 사실상 결정된 상황에서 "앞으로는 안 할 테니 상을 받지 않겠다"며 끝까지 고사한 적도 있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인 그의 선행을 반대했지만 나중엔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자가 돼 줬다.
가톨릭자조회 박명서 회장은 "옛날에는 한센인들이 병원 진료는 엄두도 못 낸 것은 물론이고 시내버스도 못 타고 잠잘 곳도 없어 공동묘지 옆에서 자는 일도 많았다"며 "이만큼 사람대접 받고 사는 건 모두 강 원장님 같은 분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강 원장이 30여년 간 이렇게 자신을 희생해 가며 얻은 것은 무엇일까.
"김수환 추기경께서 사랑은 머리에서부터 가슴까지 온다고 말씀하셨는데 가슴으로 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봉사에서 얻은 보람과 기쁨이 너무 커서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어요. 다시 태어나도 꼭 다시 할 겁니다."
강 원장은 이날 찾아온 한센인 대표들에게 "제가 한 일도 없는데 먼길 오시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라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k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