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종 상극
상극은 앞서의 상생을 제대로 이해했으면 저절로 알게 마련이다. 본래 상생과 상극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지고 마치 다른 별개의 사물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어찌 정확한 시각(視覺)이라고 할 수 있으랴!
예를 들면 水生木의 경우, 1水가 3木을 생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2火라는 상극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자연만물은 서로가 克을 통하여 生을 하고, 生을 통하여 克을 하면서 존재한다. 이런 법칙을 모르면 그냥 만물은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노자의 무위이화(無爲而化)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저절로 되는 것’을 가리킨 게 아니다.
자연은 지금 이 시간에도 무한한 노력과 정성을 들인다. 어찌 공(功)을 들이지 않고서 과(果)를 먹을 수 있는가? 진실로 무위이화는 무지한 인간의 뜻대로 살지 말고, 영원한 순리를 깨달아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하는 바 없이 된다’는 말은 천지인 3신이 하나가 되면, 그것은 하늘의 뜻도 아니며, 땅의 뜻도 아니고, 인간의 뜻도 아니다. 이처럼 특정한 주인공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無爲라고 한다.
그것은 마치 천부경의 ‘일시무시일석삼극’과 같아서 三•一(天一, 地一, 人一)중에서 그 어느 一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고 한 그대로다. 즉 ‘無爲 = 無始一’이다. 그렇다고 하여 始一이 없다고 하거나, 爲가 없다고 하는 건 말도 안 된다. 三•一이 되어서 행하는 모든 것은 다 온전한 것이기에 自然이라고 한다. 이중에 어느 것 하나도 빠지면 결코 자연은 아니다. 따라서 3신이 일관하는 공부를 하지 않고 어찌 알 수 있으랴! 개벽주로 오신 증산께서도 ‘공부하지 않고 어찌 알리요!’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상극은 상생과 더불어 생각하면 쉽게 그 진미를 맛 볼 수 있다. 앞에서 水生木의 예를 들었지만, 水가 木을 生하기 위해서는 덧셈과 뺄셈의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덧셈은 1(6) + 2(7)이요, 뺄셈은 1(6) - 3(8)이다. 이것은 앞의 ‘金生水’에서 언급을 한 바 있으나, 이번 기회에 좀 더 정밀한 관찰을 해보자.
앞에서 언급한 부분을 다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1(6) + 2(7) = 3(8)목은 차가운 水氣를 따스한 2, 7火氣로 녹이면 생동하는 木이 된다는 말이고, 1(6) - 3(8) = 3(8)목은 본래 물에는 11귀체가 들어 있었다는 걸 알려주는 셈이다. 즉 3 + 8 = 11이라는 生의 中(3)과 成의 中(8)을 모두 내포한 상태인데, 水火라는 기본적인 음양의 매체가 하나 된 3,8(1,6 + 2,7)이야말로 물이 지니고 있는 水平의 평등과 불이 지니고 있는 귀공(歸空)을 다 합해 놓은 11귀체의 상징이라는 걸 입증해 준다.”
차가운 水氣를 따스한 火氣로 녹인다는 말은 엄밀히 말하자면 水克火가 아니라 오히려 화모수(火侮水)라고 해야 한다. 수극화는 말 그대로 물로 불을 끄는 상태를 가리킨다. 물은 왜 불을 꺼야만 할까? 그 답은 간단하다. 물을 만들어주는 것이 金이기 때문이다. 불이 너무 강력하면 金의 기운이 약해져서 金生水를 할 수 없으니 水의 입장에서는 火를 극할 수밖에 없다. 이걸 수리로 나타내면 1(6) - 2(7) = 4(9)다.
이처럼 水克火는 결과적으로 4,9金을 生하여 金生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걸 달리 본다면 1(6) + 4(9) = 5(10)토라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을 8괘로 본다면 태양(9)과 태음(6)의 합이 아닌가? 이는 곧 1(6) + 4(9)으로 유지되던 5(10)토의 평화를 2(7)火가 들어와서 깨버린 것을 다시 복원하고 있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