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상(物像)을 기준으로 하면 하늘은 1이 된다. 왜 그러냐 하면 1은 모든 것이 하나로 모인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비록 하늘은 텅 빈 공간이기에 무형으로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오직 유일한 형상의 집합체라는 걸 유념해야 한다. 하늘이라고 해서 형체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상대적으로 갈라지지 않았을 따름이지, 결코 형체가 없는 건 아니다. 이를 괘상으로는 세 개의 효가 모두 양으로 이루어진 ☰이라고 하였다. 즉 3극이 모두 순양(純陽)으로 충만한 상태다.
이에 반해서 땅은 3극이 모두 순음(純陰)으로 이루어진 ☷의 형상으로 그린다. 본래 음효(陰爻)인 는 상대적으로 갈라진 모습이요, 양효(陽爻)인 −는 통일된 모습이다. 음양으로 갈라지기 전의 一卽三이었던 太極은 한 개의 선인 양효(−)와 두 개의 선인 음효()로 나타난다. 이처럼 근원적인 존재는 ‘한 개(양효) + 두 개(음효) = 세 개‘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본래 태극은 3극이 한데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양은 맑고 밝은 것이므로, 그런 것들이 모인 건괘는 허공의 형상을 띠게 마련인데 그걸 나타낸 것이 ☰이다. 그러나 음은 본래 탁하고 어두운 것이므로, 그런 것들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탁한 물질의 형체를 띠게 마련인데 그걸 나타낸 것이 ☷이다.
하도에서의 水火와 복희도에서의 水火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르다. 하도에서는 水火가 極陽返陰, 極陰返陽하여 모든 형체의 표리(表裏)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으나, 복희도에서는 水를 감(坎 ☵)으로 보고, 火는 리(離 ☲)라고 한다. 만약에 하도의 기준에 맞춘다면 水는 당연히 태괘(☱)라고 해야 하며, 火는 간괘(☶)라고 해야 한다. ☱는 가장 높은 데서 생긴 음이니 극양반음이 되고, ☶은 반대로 극음반양이 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이건 후일 용담도의 동방에 ☶이 자리 잡고, 서방에 ☱가 자리 잡는 근거가 된다)
하도의 水火는 상하에서 극(6)과 극(7)을 형성하고 있으나, 복희도의 水火는 좌우에서 3리화와 6감수로 균형을 이룬다. 복희도의 상하에는 1건천과 8곤지가 자리를 차지하여 上天下地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으니, 이는 곧 천지의 형상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복희도에서는 왜 水火가 좌우(동서)로 수평관계를 이루고 있을까? 이 역시 水火의 형상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水는 겉으로 보면 차가운 음이지만 속에는 따스한 양이 들어 있으니 ☵의 괘상으로 그린 것이고, 火는 겉으로 보면 뜨겁고 밝은 양이지만 속에는 어둡고 차가운 음이 들어 있으니 ☲의 괘상으로 그렸다. 즉 물은 순음속의 양이요, 불은 순양속의 음이다. 순음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인해 모든 걸 안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로 그리고, 순양은 반대로 모든 걸 발산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로 그린다.
괘상으로 보면 건괘는 순양으로만 채워지고, 곤괘는 순음으로만 채워졌으니 극과 극이다. 순양과 근접한 것은 2태택과 5손풍(巽風☴ - 長女)이라는 두 딸이 있고, 순음과 근접한 것은 4진뢰(震雷☳ - 長男)와 7간산이라는 두 아들이 있다. 두 딸은 8소음(少陰)이 되며, 두 아들은 7소양(少陽)이 된다. 이처럼 하늘 가까이에는 8소음인 딸들이 접근한고, 땅 가까이에는 7소양인 아들들이 접근해 있는 것이 복희도의 괘상이다. 이것은 極陽(순양)에서는 음이 나오고, 極陰(순음에서는 양이 나오기 때문이다. 같은 건괘☰에서 나온 소음8이라고 해도 장녀인 손괘☴와 소녀인 태괘☱는 그 성격이 다르다. 손장녀는 ☰의 밑에서 생긴 1음이고, 태소녀는 위에서 생긴 1음이다. 즉 손장녀는 하늘 밑으로 내려 간 음이니 다 큰 여인이고, 태소녀는 하늘 위에서 생긴 음이니 막내라고 한다. 손괘를 뒤집어서 보면 태괘가 되고, 태괘를 뒤집으면 손괘가 된다. 간괘☶나 진괘☳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건괘☰와 곤괘☷도 비록 그 모양은 전혀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 하늘과 땅에서 본 시각의 차이 때문이지 실상은 같다. 감괘☲와 리괘☵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으니, 모든 사물은 본래 같은 것인데,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일 따름이다. 사실 8괘는 1태극을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참 나의 형상을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면서 사유(思惟)할 수 있는 단서(端緖)를 제공하기 위한 조상들의 깨달음의 방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