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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개의 숫자와 열 開(개)

영부, 精山 2015. 12. 14. 07:23

 * 숫자의 오묘함은 이루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다가 오는 새 해에는 더욱 더 알 찬 말씀의 창고지기로서의 천부동이 될 것을 기원합니다.


숫자는 말 그대로 무수(無數)하다. 하지만 그 기본은 1에서 10까지 ‘열 개(個)’다. ‘열’이라는 말 자체가 ‘닫힌 걸 열다’는 의미가 있으며, ‘열 개’는 ‘開闢(개벽 - 열 개, 열 벽)’과 상통한다는 점도 재미있지 않은가? 이는 곧 열 개의 숫자야말로 우리민족의 시원사상인 ‘개벽’을 가리키는 도구(道具)요, 천부(天符)라는 걸 일러준다. 따라서 열 개의 숫자가 모든 것의 기본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1은 절대성을 가리키는데, 그 절대성을 보전한 상태를 가리켜 0+1=1이라 한다. 0과 1은 둘 다 절대성을 상징하지만, 0은 공(空)과 영(零)처럼 무형, 무색, 무취, 무미, 무변 등, 무(無)의 집합을 가리키는데 반해, 1은 0이 장차 2(음양), 3(3극), 4(4상) … 등등, 모든 걸 나타내는 변화의 주체다. 즉 절대와 상대를 연결해주는 매체다. 0의 끝도 1이며, 무수하게 벌어진 만물이 다시 0으로 복귀할 적의 끝도 역시 1이니, 유무(有無)의 끝인 셈이다. 이를 가리켜 ‘1태극’이라 한다.

0과 1은 이처럼 본래 일체인데, 0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1을 통하여 모든 일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일 하다’는 말이 생겼다. 즉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은 ‘절대성과 상대성을 연결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절대성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상대성은 피조물의 형상이다.

0은 0×0=0, 0×1=0, 0×2=0에서 보는 것처럼, 자신을 부풀리는 일(1)이 없다. 그것은 영(靈, 零, 0)이기 때문이다. 왜 0은 자신을 배(倍)로 부풀리지 않을까? 그 까닭은 0이야말로 그럴 필요가 전연 없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0은 모든 걸 완벽하게 구족(具足)했기 때문이다. 만약 뭔가 부족한 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걸 채우기 위한 일(1)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0+1=1, 0+2=2, 0+3=3 … 0-1=-1, 0-2=-2, 0-3=-3 … 등등에서 보는 것처럼, 0은 그 어떤 것이든, 다 그대로 반영한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허공과 같아서 모든 유형적인 물질들이 생기거나 사라지는 부동(不動)의 바탕이다. 이처럼 0은 자신을 단 한 번이라도 드러내거나 부풀리는 일이 없다. 0의 속성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영(靈)’이라 한다.

그러나 1은 말 그대로 ‘일을 하는 주체’이기에 1×2=2, 1×3=3, 1×4=4 …에서 보는 것처럼 얼마든지 자신을 부풀리기도 하며, 1+1=2, 1+2=3, 1+3=4, 1-1=0, 1-2=-1, 1-3=-2 …에서 보는 것처럼 다른 숫자들을 변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1×1=1이다. 그러나 1은 0을 떠나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0의 동적인 측면인 변화의 모태(母胎)이므로 0+1=1이라는 수리로 나타난다.

                                              정산 왕의선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