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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2강

영부, 精山 2016. 9. 12. 10:00
⑤ 삼원색(三原色)과 5행, 팔괘 색과 빛은 각기 삼원(三原)으로 이뤄졌다. 이는 곧 우주만물이 3원으로 이뤄졌다는 반증이다. 어느 것이든 존재의 바탕에는 3원이 있다. 빛과 색, 소리도 마찬가지다. 하도는 비록 둥근 흑백의 점으로만 되어 있으나, 그 속에 스민 5행의 색깔로 보면 삼원색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빛의 삼원색은 <빨강(Red), 파랑(Blue), 녹색(Green)>이라 하며, 색의 삼원색은 <청록(Cyan), 자홍(Megenta), 노랑(Yellow)>이다. 그리고 빛의 삼원색을 합하면 백색이 되고, 색의 삼원색을 합하면 흑색이 된다. 하도의 서방은 4,9금 백색이요, 북방은 1,6수 흑색이니, 빛과 색의 삼원색을 모두 합해 놓은 셈이다. 하도의 동방에는 3,8목 청색이요, 남방에는 2,7화 적색이며, 중앙에는 5,10토 황색이니, 이는 곧 빛과 색의 3원색이 벌어진 것과 같다. 왜 이처럼 하도의 서방과 북방, 즉 金水는 3원색을 합한 흑백이고, 나머지 방위인 木火土는 각기 3원색으로 갈라져야 할까? 이걸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동방의 목, 남방의 화와 중앙의 토는 발산을 위주로 하는 것이니 ‘일석삼극(一析三極)‘이요, 金水는 수렴을 위주로 하는 것이니 ’일적십거(一積十鉅)‘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좀 의아한 게 있으니, 그것은 중앙의 5,10토다. 상식적으로 보면 土는 중앙이라 하지 않는가? 중앙은 모든 게 다 모인 곳이 아닌가? 그렇다면 3원색이 다 모인 곳이 니, 당연히 흑색이나 백색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굳이 황색(黃色)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5행으로 본 색과 물질로 본 색에는 차이가 있다. 물질로 본 색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빛의 삼원색과 색의 삼원색은 매우 비슷한 듯하나 사실은 다르다. 다음 그림을 보라. 색의 삼원색 빛의 삼원색인 빨강(Red)과 색의 삼원색인 자홍(Megenta)은 매우 흡사하지만, 빨강이 자홍(紫紅)보다 좀 더 강렬하고, 빛의 삼원색인 파랑(Blue)과 색의 삼원색인 청록(Cyan)도 매우 흡사하면서도 파랑이 더 진하며, 빛의 삼원색인 녹색(Green)과 색의 삼원색인 노랑(Yellow)도 흡사하면서도 녹색이 더 진하다. 이처럼 빛의 삼원색이 색의 삼원색보다 강한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양강음유(陽强陰柔 :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럽다)는 음양의 본래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색을 숫자에 붙인다면, 빨강(Red)은 7이요, 자홍(Megenta)은 2라 할 것이고, 파랑(Blue)은 3이요, 청록(Cyan)은 8이라 할 것이며, 녹색(Green)은 5이고 노랑(Yellow)은 10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동방과 남방, 중앙의 경우를 말한 것이고, 그러나 삼원색에서 본다면 서방의 백색과 북방의 흑색은 하도에서처럼 生成도 없고, 음양도 없다. 애초부터 흑백은 삼원색이 아니라, 1원이기 때문에 아무런 차별이나 구별이 없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하도의 5행색을 물리적인 색상과 연결시키려 한 게 무리였을까? 과연 그럴까? 서북방의 金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수렴의 기능’이 강한 반면, 동남방의 木火는 분열과 발산의 기능이 강하기 때문에 강약으로 나누어졌다. 그렇다고 하여 서북방의 금수에는 강약이나 음양이 없는 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색은 빛의 바탕에 있고, 반대로 빛은 색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기 때문에 빛의 3원색이라 하면서도 Red는 Megenta보다 더 강하며, Megenta는 Red보다 부드럽다. 또한 Cyan은 Blue보다 더 부드러우니, 그 까닭은 같은 파랑이지만 흰색을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검은색을 바탕에 깔았기에 Green은 Yellow보다 더 탁한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이런 걸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물의 음은 양을 바탕으로 하며, 양은 음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삼원색과 하도를 연결(連結)지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삼원색은 8색, 즉 8괘와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빛의 3원색, 색의 3원색을 합하면 6색이요, 거기에 빛과 색의 종합인 흑색과 백색을 합하면 도합 8색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8괘와 부합한다. 그걸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백색 : 건☰ 흑색 : 곤☷ Blue : 진☳ Cyan : 손☴ Green : 감☵ Yellow : 리☲ Red : 간☶ Megenta : 태☱ ⑥ 생수(生數)와 성수(成數) 하도의 10개의 숫자는 생수와 성수로 구분된다. 生數는 말 그대로 ‘모든 걸 낳는 수’이고, 成數는 ‘형상이 다 이뤄진 수’다. 즉 생수는 한창 자라나는 상징이고, 성수는 다 자란 상징이다. 그러기에 생수는 활발하고 왕성한 의욕을 자랑하고, 성수는 속이 깊게 마련이다. 생수는 선천(先天)을 가리키며, 성수는 후천을 가리킨다. 선천은 발산과 분열을 주도하면서 진취적인데 반해, 후천은 무엇보다도 안정을 도모한다. 이것은 생성(生成)이라는 문자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잇다. 生은 초목이 밑의 땅(一)을 발판으로 해서 좌우로 가지가 벌어진 모습을 그린 문자라 한다. 그러나 一태극을 발판으로 해서 牛(소 우)가 서 있는 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牛는 팔괘로는 곤괘요, 지지로는 북방의 丑에 속한 것으로 물질의 상징이다. 소는 밭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는 일을 하는데, 이때의 밭은 곤괘를 가리킨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흙으로 사람을 짓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밭에서 농산물을 키우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한 법이므로, 소는 북방의 丑位에 배치를 했다. 물은 一水요, 그것을 발판으로 牛가 선다고 하여 生이라 했다. 成(이룰 성)은 戊(다섯 째 천간 무, 우거질 무)속에 丁(장정 정, 성할 정)이 합한 문자다. 戊는 戈(창 과)을 크게 丿(움직일 별, 삐침 별)한 모양이다. 이걸 종합하면 ‘속에 丁2火를 품고 날 선 창을 크게 움직이는 모습’이 된다. 이처럼 生은 一子水를 발판으로 한 것과 달리 成은 二丁火를 품고 있다는 게 대조적이다. 즉 선천의 生은 물을 근본으로 삼는데 반해, 후천의 成은 불을 근본으로 삼는다. 사실, 생수와 성수를 결정짓는 것은 5다. 예를 들면, 생수1은 5를 더하여 성수 6이 되며, 나머지 생수(2,3,4)도 역시 5를 만나서 성수(7,8,9)가 된다. 성수가 되기 위해서는 5가 절대적이며, 또한 2丁火라는 음화(陰火)를 품어야 한다는 사실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런 사실은 역(易)에 꽤 밝다는 평을 듣는 사람들도 모르고 있다. 2丁火는 천간으로 본 것이요, 만일 지지로 본다면 2巳火가 된다. 二를 품에 넣은 戊는 成이지만, 一을 품에 넣은 戊는 戌(개 술)이 된다. 서북방에서 3극이 다 모인 곳이 戌이다. 그 속에 들어 있던 3극이 제일 먼저 갈라져 나간 것을 一, 六水라 한 것이다. 현무경 용담도의 개벽의 이치에 의하면 서북방의 戌이 7도로 이동하는데 그 곳이 바로 2巳火다. 즉 중앙 戊속에서 선천의 一이 다 하여 二로 바뀐다는 걸 일러 준 것이 바로 戌과 成의 문자다. 成의 丁은 2巳火이니, 戌과 巳의 합일이 곧 선천과 후천의 成功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치를 현무경의 술부(戌符)에서는 <천지지중앙심야고동서남북신의어심(天地之中央心也故東西南北身依於心)>이라 했다. 천지의 중앙은 心이므로 동서남북이 그 몸을 心에 맡긴다는 뜻이니, 이때의 心은 天地之中央인 인존(人尊)문명의 시발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선천의 진사지간(辰巳之間)에서 후천의 시두인 사시(巳時)와 세수인 유정월(酉正月)이 출현한다는 말씀이다. 자세한 사항은 ‘현무경 해설’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하튼, 성수가 되기 위해서는 5가 절대적이며, 또한 2火라는 火를 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5와 火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1생수가 6성수로, 2생화가 7성화로, 3생목이 8성목으로, 4생금이 9성금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5土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 土에는 5陽土와 10陰土라는 두 개의 土가 있는데, 5양토는 火가 강하고, 10음토는 水가 강하다. 다시 말하자면 生에서 成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은 양이 주도한다는 뜻이다. 양이 주도한다는 건, 내면에서 표면으로 발출(拔出)하게 한다는 말이다. 1,2,3,4라는 내면의 기운이 5양토의 기운을 얻어서 6,7,8,9라는 표면의 成物이 되려고 하는데, 이때에 필요한 양토의 기운이 바로 2巳火다. 한창 자라나는 생장기에는 7午火의 陽火보다는 2巳火라는 음화가 더 절실하다. 왜냐하면 양화는 너무 강렬하여 수기(水氣)를 말려버리기 때문이다. 음화는 수기를 말리는 게 아니라, 차가운 동토(凍土)를 따스하게 녹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5戊陽土에는 二丁火가 들어가야 비로소 成을 하게 마련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5. 열 개의 숫자의 뜻>에서 다루기로 하고 한 가지만 덧붙이면, 12운성(運星) 중에서 火와 土의 운성을 같이 하게 된 까닭이 방금 전에 말한 것에 근거했다는 사실이다. 즉 모든 5행은 생에서 성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렇게 전환하는 매체를 가리켜 土라 하며, 이때의 土는 陽土다. 양토는 陰火를 用으로 삼게 마련이니 火와 土의 운성을 같이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음토가 주도하는 후천이 오면 당연히 陽火를 用으로 삼게 되니, 음간(陰干)과 양간(陽干)의 운성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지금 활용하는 12운성은 양간을 위주로 한 것이다. 이것을 도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 (도표) * 양간과 음간은 반대 방향으로 운이 흐른다. * 4고(四庫 : 辰戌丑未)를 기준으로 ‘양(養) - 관대(冠帶) - 衰 - 墓’가 운행한다. 4. 숫자의 뜻 하도는 하늘에서 본 만물의 상징이다. 하늘에서는 땅에 있는 만물이 보이게 마련이다. 하도에 10개의 숫자가 있다는 것은, 여러 모르 시사(示唆)하는 바가 많다. 자세한 것은 <10>수를 언급할 적에 따로 하겠지만, 그 모든 것은 다 0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하도, 낙서, 용담이라는 3대 상서를 언급하기 위해서는 불가불 0에 대한 이치를 궁구(窮究)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① 0 * 허(虛), 무(無), 공(空) 수의 기본은 0과 1이다. 만물은 무형과 유형으로 대별하는데, 무형의 상징은 0이요, 유형의 상징은 1이다. 0의 형태는 둥근 원형이니, 막힘이 없는 영원함과 대자유를 가리킨다. 0은 무형과 무색, 무취, 무미 등등, 모든 무(無)를 상징하는데, 공(空)과도 그 맥이 상통한다. 無와 空의 차이를 굳이 말한다면, 空은 만(滿)의 상대이고, 無는 유(有)의 상대이다. 滿(찰 만)은 뭔가를 꽉 채운 상태이니, 그와 상대적인 空은 텅 빈 그릇이 될 것이고, 有는 ‘있음’을 가리킨 것이니, 無는 ‘없음’을 의미한다. 즉 空은 형태와 부피의 변화를 가리키는데 반해, 無는 어떤 형태나 부피의 변화도 없다. 왜냐하면 無는 모든 것이 一切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허(虛)가 있다. 이것도 ‘빌 허’라고 하였으니, 앞의 空과 無와 유사하지만 그 역시 그 의미가 다르다. 虛에 대한 것은 상대적인 實(열매 실)과 연관시켜서 생각을 해보면 쉽게 알 수 있으니, 무언가 끝이 없는 상황을 가리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알게 해주는 단어가 있으니, 허공(虛空)과 공허(空虛)가 그것이다. 허공이나 허상(虛想, 虛像), 허명(虛名), 허영(虛榮), 허무(虛無) 등등, 앞에 虛자가 붙는 경우는 의외로 상당수다. 대개 이런 경우는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이 알맹이가 없는 상태임을 의미한다. 虛空은 ‘텅 비어 있는 곳’이요, 虛想은 부질없는 헛된 생각이요, 虛像은 무언가 보이기는 하는데 실체가 없는 형상이고, 虛名은 이름만 요란할 뿐 알맹이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며, 虛榮은 필요 이상의 겉치레이며, 虛無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하여 덧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앞에 虛자가 붙으면 대개의 경우, 뒤의 것이 알맹이나 실체가 없다는 수식(修飾)의 기능을 한다. 이처럼 虛는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라, 무언가 있다 해도 알맹이가 부실한 상태, 즉 ‘있으나마나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와 반대로 공허(空虛), 공상(空想, 空相), 공각(空殼), 공망(空亡), 공염불(空念佛) 등등, 앞에 空자가 붙는 용어도 있다. 空虛는 虛空을 거꾸로 써놓았는데, 허공이 물리적인 상태, 즉 ‘텅 빈 하늘’을 가리킨 것임에 비해, 공허는 텅 빈 정신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즉 虛가 물리적이라면, 空은 정신이나 심리적인 면을 가리킨다. 그러기 때문에 같은 想(생각할 상)이라 해도, 虛想과 空想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이라는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허상은 주로 물리적인 면에 해당한다면 공상은 정신적인 면에 해당한다는 게 다르다. 즉 허상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지만, 공상은 전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空殼은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조개껍질이요, 空亡은 망해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이고, 공염불도 아무런 소득이 없는 불필요한 노력을 가리킨다. 이처럼 虛가 주로 외형적이면서 현실적인 면에서의 빈 상태를 가리킨다면, 空은 주로 내면적이면서 비현실적인 면에서의 빈 상태를 가리킨다. 이처럼 ‘없음’이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문자는 無, 空, 虛라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다시 한 번 정리를 한다면 다음과 같다. 無는 비교하거나 상대할 만한 것이 없는 절대적인 것이요, 空虛는 존재는 있지만, 무형, 무색, 무취, 무미 등등, 無에 속한 걸 空이라 한다면, 有에 속한 것은 虛라고 한다. 즉 空은 질적(質的)인 면이요, 虛는 양적(量的)인 면이다. 사실 空과 虛에 대한 구별보다, 空과 無에 대한 개념의 구별이 더 어렵다. 그러나 空은 진공(眞空)과 허공(虛空), 만공(滿空)으로 구분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둘 사이의 차이를 규명할 수 있다. 즉 空은 비록 형색, 맛 등, 육적인 면은 없으나 비울 수도 있고, 채울 수도 있지만, 無는 그런 게 아니다. 즉 空은 비록 형색은 없으나 상대적인 면이 있어서 무형적인 면으로 다양한 변화가 발생하지만, 無는 절대적인 것이기에 일체의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숫자 0은 이 셋을 다 내포한다. 無에 해당하는 0은 0자체를 가리키고, 空에 해당하는 0은 온갖 색이 사라진 무색(無色)을 가리키며, 虛에 해당하는 0은 온전한 0이 못 된, 부실한 0의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자면, 無는 절대적인 0이니 天에 속한 것이요 뿌리에 해당한다. 空과 虛는 상대적인 0이니, 둘 다 有와 無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둘 다 無를 바탕으로 하지만, 空은 그중에서도 장차 有로 드러날 모든 것들을 총합한 상태라면, 虛는 有를 바탕으로 한다는 게 다르다. 그러므로 0을 제외한 1~9에 이르는 숫자는 虛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전통적인 3극으로 비유한다면, 無는 무극이요, 空은 태극이며, 虛는 황극에 속한다. 더 자세한 사항은 <2. 영(零)과 연관 된 것들>에서 살피기로 한다. * 영(零)과 영(靈) 0은 한자로 영(零)이라 하는데, ‘조용히 내리는 비 영’이라 하고, 부수는 우(雨)다. 발음이 같은 靈(신령 영)도 역시 부수를 雨로 한다. 零은 흔히 말하는 ‘제로’를 가리키는데, 왜 雨를 부수로 하는 걸까? 또한 ‘신령, 죽은 사람의 혼백, 목숨’을 가리키는 靈도 雨를 부수로 하는 걸까? 문자는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먼저 雨자를 분석해 보면, 帀(두를 잡)안에 氺(물 수)가 들어찬 모습이다. 帀은 맨 위의 하늘(一)에서 巾(수건 건)을 밑으로 드리운 형상이다. 이처럼 하늘에서 커다란 수건을 밑으로 둘러 친 형국인 帀과 그 속에 4방의 물을 담고 있는 상태를 나타낸 상형문자가 雨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조상들은 비를 ‘공중의 수분을 함유하고 있는 커다란 보자기나 수건’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해서 ‘제로’를 가리키는 0의 뜻일까? 그것은 ‘비’의 속성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는 모든 걸 깨끗하게 한다. 지저분한 것들을 말끔하게 씻어버리니 ‘제로’와 그 뜻이 통한다. 雨밑에 令(영 영, 하여금 령)이 붙어서 발음도 ‘영’이라 하는데, ‘비가 전하는 하늘의 명령’이란 의미가 된다. 하늘이 전하려고 하는 건, ‘비처럼 모든 걸 깨끗한 상태인 제로’로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늘은 하늘의 형상을 닮으라 하고, 땅은 땅의 형상을 닮으라고 한다. 하늘의 형상은 텅 빈 상태이니, 무형, 무색, 무취, 무미한 것들이다. 하늘은 일체 無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숫자로는 불가피하게 ‘0’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0은 일체 모든 것이 없는 상태이므로 다른 것과 비교할 만한 것이 없는 오직 유일한 숫자다. 이를 가리켜 天一一이라 한다. 즉 하늘은 상대가 없는 절대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은 절대적인 상태를 도형으로 나타내면 둥근 원(○)이므로 ‘천원(天圓)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천원은 天元과 泉原으로도 쓸 수 있다. 즉 모든 것의 으뜸이며 근원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하늘의 형상은 절대적인 원‘이란 사실이다. 원의 형상은 지름과 반지름이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형상인데, 비교하거나 상대할 만한 것이 없는 절대적인 상태이므로 무형, 무색, 무취라고 하게 된 것이지, 그 존재 자체가 아예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있다, 없다>는 것 자체부터 無에서 보면 어불성설이다. 그러기 때문에 無는 무극에 속한다. 이와 달리, 땅은 일체 有를 가리킨다. 하늘은 하나이니 天一이라 한 것처럼, 땅도 역시 하나이니 地一이라 한다. 물론 사람도 人一이다. 자칫 ‘또 천부경 타령이야?’라고 언짢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수리(數理)를 논하려면 천부경은 필연적(必然的)이다.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을 대개의 경우 ‘하늘도 하나는 1이요, 땅의 하나는 2요, 사람의 하나는 3’이라는 식으로 풀이를 하는데,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하지 않은가? 자세한 것은 차츰 전개할 것이고, 지금은 0과 연관된 것만 살피기로 한다. 一은 ‘하나’다. 즉 갈라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은 천지인이 갈라지지 않은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천지인은 각기 3극이 모인 것이므로, 반드시 그걸 셋으로 쪼개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전체적인 면만 본다면 주마간산(走馬看山)이요, 부분적인 것만 본다면 ‘나무는 보되, 숲은 못 보는 격’과 같다. 전체와 개체를 한꺼번에 보는 안목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이다. 앞서 0에는 동일한 雨를 부수로 하는 零과 靈이 있다고 했다. 零에 대한 건 이미 설명을 하였는데, 지금은 0속에 들어 있는 천지인 3극과 연관된 언급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바로 0을 靈이라 하는 근거다. 靈은 ‘신령 령’이라 하는데, 雨밑에 세 개의 口가 들어 있다. 0을 하늘을 가리키는 절대적인 無에서 보면 零이 되지만, 땅을 가리키는 상대적인 空에서 보면 靈이 된다. 零에는 비를 통해서 하늘의 절대적인 명령(令)을 전달한다는 뜻이 있으니, 하늘의 명령(말씀)은 본래 영원불변하는 절대적인 진리다. 그 진리 앞에서는 모든 것이 감히 그 이름을 내밀 수 없으니 ‘제로(0)’라고 하게 된 것이다. 반면, 靈에는 세 개의 口와 巫(무당 무)가 있다. 零은 오직 한 가지 명령만 있으나, 靈에는 세 개의 口와 巫가 있다. 즉 본래 하나(一)였던 것이 셋으로 벌어진 게 靈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零이 천지인 3계로 벌어진 상태를 靈이라고 한 것이다. 零은 절대적인 법칙이나 말씀, 명령을 가리키지만, 靈은 상대적인 변화가 따른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영은 죽은 사령(死靈)도 있고, 살아 있는 생령(生靈)도 있지 않은가? 또한 靈은 나가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한다. 이와 같이 0에는 절대불변과 상대적인 변화라는 양면이 다 들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무수한 숫자는 0에서 나와 0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다시 정리를 한다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삼령(三靈)에 의해서 전달이 되며, 그걸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巫 다. 巫는 두 사람(人)이 工(장인 공, 만들 공, 지을 공)한 상태다. 雨와 세 개의 口를 합한 게 霝(비올 령)인데, 그 또한 같은 맥락이다. 여하튼 霝과 巫를 합한 문자가 靈이라는 사실은 많은 걸 시사(示唆)한다. 工은 본래 위의 一(天一)과 밑의 一(地一)을 중간의 一(人一)이 연결을 한 모습이다. 즉 천지를 하나로 연결하는 일이 진정한 工이요, 그걸 연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공부(工夫)라 한 것이며, 흔히 ‘공부 하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천지부모의 뜻을 이어받아 이상세계를 세우는 것이 진정한 공부라는 걸 알 수 있지 않은가? 이처럼 하늘은 비(雨)를 통해서 모든 걸 깨끗하게 ‘비우는’ 진리를 내리며, 땅에서는 그걸 받은 3신이 천지인을 하나로 일관하는 巫를 통해서 신령한 상태로 나타나는데, 이 모든 걸 보여주는 숫자가 바로 0이다. 靈을 땅에 속한다고 하는 근거는, 세 개의 口자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둥근 ○이지만, 땅은 네모진 ⃞(方)으로 표기한다. 둥근 ○은 모두가 동일한 절대적인 형상이지만, 네모진 ⃞은 지름과 반지름이 각기 한 쌍으로 이루어진 무수한 점과 선의 연결이다. (그림) (가장 긴 대각선도 두 개의 선을 한 쌍으로 하고, 가장 짧은 선도 두 개의 선을 한 쌍으로 한다. 나머지 모든 선도 전부 두 개를 한 쌍으로 한다) □의 형태는 이처럼 모두가 한 쌍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를 천부경에서는 地一二라 하였다. 즉 ‘땅에서 갈라지기 이전의 온전한 상태(地一)는 二’라는 뜻인데, 물론 二는 음양을 가리킨다. 땅은 모든 유형의 집합이요, 유형은 곧 상대적인 것으로 구성된다는 뜻이다. 天一은 애초부터 무형으로 이루어질 것이기에 절대적인 一이라고 한 天一一과 매우 대조적이지 않은가? 0에는 이처럼 절대적인 하늘의 진리의 말씀을 가리키는 零과 상대적인 땅의 음양을 가리키는 靈을 다 내포한다. * 허(虛) 虛는 ‘빌 허’라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무언가 비어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무조건 텅 빈 게 아니라, ‘적다, 드물다, 틈새’ 등을 가리킨다는 건 앞서 말했다. 그런 사실은 虛라는 문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虛의 부수는 ‘虍(호피무늬 호)’인데, 흔히 ‘범호 엄’이라 한다. 즉 ‘호랑이 가죽에 있는 무늬’이다. 짐승의 가죽에 생긴 무늬를 말한다면 호랑이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호랑이 무늬와 연결하여 虛라는 문자가 나왔을까? 호랑이의 무늬를 虍라고 한 사실부터 살펴보자. 이것을 ‘범호 엄’이라는 부수의 명칭을 삼은 까닭은, 厂(기슭 엄, 벼랑 엄, 낭떠러지 엄)이나, 广(집 엄, 마룻대 엄)과 비슷한 형태 속에 七(일곱 칠)을 품었기 때문이다. 즉 厂위에 卜(점 복)이 있으니, 기슭이나 벼랑 위에서 점을 치는 형국이다. 점을 친다는 건, 하도와 낙서, 용담이라는 3대 상서와 같은 우주변화의 원리를 궁구하는 일이다. 그것은 본래 거북의 등껍질로 한다. 물론 황하에서 신령한 거북의 등에 나타난 무늬라고 하여 거북의 껍질로 점을 쳤지만, 거북은 머리와 네 발을 안으로 집어넣는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즉 은밀한 내면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점을 치는 행위이다. 그런데, 호랑이는 그 기세가 맹렬하다. 따라서 호랑이의 가죽무늬로 점을 친다는 건, 위엄과 권위로 세상을 주름 잡는다는 상징이다. 그런 건 거의 대부분 ‘허장성세(虛張聲勢)’로 끝나게 마련이다. 물론 내면의 七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허장성세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虍안의 높은 丘를 虛라 하니, 그것은 허장성세로 제아무리 높이 쌓은 것이라 해도 결국은 텅 빈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선천의 물질문명의 세수(歲首)를 호랑이를 상징하는 인월(寅月)로 삼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歲首는 말 그대로 ‘해의 머리, 햇머리’이니,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 어두운 세상에서 그 머리를 드러내는 상징이다. 즉 태양과 같은 본성을 호랑이와 같은 위엄과 권위로 머리를 들려고 하는 게 선천의 물질만능주의이다. 후천의 세수는 酉(닭 유)라고 한다는 것과 비교를 해보면 그 의미가 더 선명해 질 것이다. 이처럼 虛에는 實과 상대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 0의 기능(機能) 0은 위에서 살핀 것처럼 천지인의 속성이 있다. 따라서 그 기능도 세 가지다. 첫째, 하늘의 속성을 드러내는 기능이 있으니, 그것은 모든 有에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有라는 글자 자체에 月이 크게 가르고(一), 삐침(丿)한 상태가 있으니, ‘달빛을 받아 나타난 것을 有라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달은 태양 빛을 반조(返照)한 것이니, 사실상 有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서 無는 사람(人)이 양손에 장식을 들고 춤을 추는 형상을 그린 문자인데, 火를 부수로 한다. 즉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빛을 4방에 흩뿌리는 춤을 추는 형국이니, 이는 곧 스스로 발광(發光)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無는 실상이요, 有는 허상을 가리킨다. 0이란 숫자는 비록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없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로부터 일체의 숫자가 파생(派生)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0은 부동(不動)의 음(陰)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걸 가리켜 천부경에는 ‘궤(匱)’라 하였으니 ‘일적십거무궤화삼(一積十鉅無匱化三)’이 그것이다. 즉 3극으로 갈라졌던 三•一이 다시 하나로 일적(一積)을 한 十이 되면, 無始一과 無終一과 같은 세 개의 0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걸 이렇게 표기한 것이다. 0의 기능은 0에 四則(사칙)演算(연산)을 적용하면 쉽게 알 수 있다. 4칙은 가감승제를 가리킨다. 가감은 본래 일체인데, 가산(加算)은 양에 해당하고 감산(減算)은 음에 해당한다. 승산과 제산도 일체인데 승산(乘算)은 양이요 제산(除算)은 음이다. 같은 수끼리 불어나거나 줄어드는 셈법은 승제라 하고, 다른 수끼리 불어나거나 줄어드는 셈법은 가감이라 한다. 가산과 감산은 이질적인 요소끼리의 셈인데 반해, 승산과 제산은 동질적인 요소끼리의 셈법이다. 이렇게 본다면 덧셈과 뺄셈은 화학적인 작용이 되고, 곱셈과 나눗셈은 물리적인 작용이 된다. 0에 어떤 숫자를 가감승제(加減乘除)를 한다 해도 0 자신은 결코 불변한다. <0+0=0, 0+0000=0, 0-0=0, 0-0000=0> <0×0=0, 0÷0=0, 0×0000=0, 0÷0000=0> 이것은 0과 같은 0을 사칙연산한 결과이고, 다른 숫자와 사칙연산을 하면 <0+1=1, 0+123=123, 0-1은 -1, 0-123은 -123> <0×1=0, 0×123=0, 0÷1=0, 0÷123=0>이 나온다. 즉 0은 0이 아닌 다른 숫자와 가감을 하는 경우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숫자만 드러낸다. 이것은 無는 모든 만유(萬有)의 형상이나 변화에 영향을 받지도 않으며 주지도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이를 가리켜 절대(絶對)라 한다. 그러나 0이 다른 숫자와 곱셈과 나눗셈을 하면 일체 모든 숫자를 다 0으로 돌려버리니, 이것은 0을 아무리 많이 부풀리거나 쪼갠다 해도 항상 0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즉 0은 모든 형상과 변화의 바탕이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런 것들과 무관(無關)하다는 걸 말해 준다. 이런 이치를 안다면 오늘날 양자학에서 궁극적인 물질의 바탕을 아무리 찾으려고 해 봤자, 결국 無라는 사실에 직면할 수박에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無가 ‘아무 것도 없다’는 건 아니다. 0은 비록 무형, 무색, 무미, 무취라 하지만 0을 바탕으로 해서 무궁한 생성과 변화를 하게 마련이다. 즉 0에서 1~9란 숫자가 벌어지고, 다시 10에서 19로 벌어지며, 또 다시 20에서 벌어지는 등, 반드시 0을 바탕으로 해서 모든 숫자가 벌어진다. 이런 사실은 무얼 뜻할까? 그것은 모든 사물의 바탕에는 무형적인 영(靈, 0)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준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며, 이런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을 가리켜 ‘영적인 인간’이라 한다. 영적인 인간들은 우주만물은 영생한다는 게 눈에 보이기 때문에, 인생도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그에 맞는 생을 누린다. 번뇌와 망상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모든 게 유한하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기 때문에,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0이 절대적이며 무궁한 바탕이 되는 까닭은, 그것이 한 개가 아닌 세 개의 0이라는 입체적인 구(球)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일시무시일’은 유형적인 우주만물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그 근원인 0에도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게 참다운 깨달음이다. 우리의 영(靈)은 삼령(三靈)의 결집이다. 각자의 내면에 깃든 삼령의 존재를 자각할 적에 비로소 삼신이 광채를 내게 마련이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말의 의미가 와 닿을 것이다. * 0의 구조(構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0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9개의 숫자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숫자의 구조(構造)는 9층이란 사실이다. 숫자의 구조는 사실, 0의 구조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모든 숫자는 다 0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구조라는 표현도 九造, 九組, 九祖와 같은 맥락이다. 構(얽을 구)라는 문자는 木으로 冓(짤 구)한다는 뜻에서 나왔는데, 0속에 들어 있던 음(一)과 양(丨)이 十을 하여 좌우로 八(나눌 팔)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0은 본래 無, 空, 虛한 것인데, 9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낸다. 9를 가리켜 九라 하는 것도 음미할 만하다. 九는 부수인 乙이 크게 丿(삐침 별)한 모양이다. 이때의 乙은 甲과 상대적인 것이다. 甲乙은 만물의 시작을 가리키는데, 갑은 아버지요, 을은 어머니로 본다. 그래서 건괘☰는 天父요 곤괘☷는 地母라 한다. 아버지의 정자를 받아서 어머니가 자식을 출산하는 1~9의 과정을 상징한 문자가 九다. 0은 입체(立體)다. 대개의 경우 0을 평면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런 시각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한, 0의 베일을 벗기지 못한다. 평면과 입체라는 용어도 생각할 게 많으니, 입(立)하면 체(體)라 하고, 누우면(平) 면(面)이 된다. 사물의 형체는 1차원의 점에서 2차원의 평면으로, 그리고 3차원의 입체로 진행한다. 0에는 이와 같은 차원들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때로는 평면으로, 때로는 입체로 보이게 마련이다. 평면적이라 함은 2차원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4방으로 나타난다. 즉 음과 양이 한데 겹친 十字의 형태가 이에 해당하는데, 중심의 한 점이 양방향으로 벌어진 형태이다. 따라서 평면은 음양의 결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입체는 3차원이니, 3극이 한데 겹친 형태이다. 음양이 하나 된 十字에도 물론 중심이 있지만, 3극이 하나 된 중심과는 그 성격과 차원이 전혀 다르다. 비유 하자면, 평면적인 중심은 부부가 하나 된 가정이요, 입체적인 중심은 부모와 자녀가 하나 된 가정이다. 같은 가정이라 하지만, 둘의 차이는 사뭇 다르다. 마찬가지로 같은 0이라 하지만 평면적인 0과 입체적인 0은 전혀 다르다. 평면적인 가정에 비해 입체적인 가정은 공고(鞏固)함이 훨씬 강하다. 우주만물은 모두가 입체다. 그것은 0도 입체요, 거기에서 발생한 모든 숫자도 입체라는 걸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천부경의 ‘일석삼극(一析三極)’의 진정한 깨우침이다. 입체적인 0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1,2,3이라는 기본적인 속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0의 구조와 기능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사항이다. 이를 가리켜 천부경에는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이라 했다. 一은 절대적인 바탕이다. 따라서 ‘天一地一人一‘은 ’천지인의 절대적인 기본’이라는 말이 된다. 하늘의 절대는 1이요, 땅의 절대는 2이며, 사람의 절대는 3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앞서도 언급했기에 중언부언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평면의 平(평평할 평)은 상하의 음양(二)과 좌우의 음양(丨丨)이 하나로 결집한 형상이다. 이것은 방금 전에 언급한 대로 음과 양이 각기 한 쌍으로 상대하는 형국이다. 이와 달리 입체의 立(설 립)은 3극의 중심(바탕)인 一을 발판으로 표면에 생긴 여섯 개의 十, 즉 六이 서 있는 형국이다. 이처럼 平과 立이라는 문자에도 조상들의 슬기가 배어 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1차원의 원) ․ 점 (2차원의 원) (3차원의 원)